카오신) 나무

2015. 5. 31. 01:20 from 에바

  아가, 너는 울고 있니?”

  쏟던 눈물이 절로 멈춘 고개를 쳐들고 여기저기 둘러본 하늘엔 푸르게 피어난 나뭇잎들만이 바람 소릴 흉내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성한 잎들 사이로 손을 뻗듯 햇살이 곧게 쏟아졌고 나는 기복이 잦아든 마음으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던 나무에 완연히 기댔다. 나무껍질에서 스며나오는 청아한 내음을 맡으니 절로 숨이 곱게 나왔다. 그게 내가 그에게 처음 안긴 날이었다.

  수백 년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품어줄 정도의 나이는 됐다고 했다. 세월 사람들은 어른 아이 없이 여름이면 자신의 그늘에서 달아오른 피부를 식혔고 봄가을에는 선선히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의 이파리를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말들이 내 마음에 들렸다. 나는 음파로는 전해지지 않는 목소리가 좋아 매일 같이 그의 뿌리께에 앉아 말을 걸었다.

  그럼 요정 같은 거야? 이 나무에 사는.”

  글쎄,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 걸. 난 아주 작은 방에서 싹 틀 때부터 여기에 있었어.”

  자그마한 개미 한 마리가 발치를 지나 기어갔고 나는 기지개를 켰다.

  내 이름은 이카리 신지야.”

  예쁜 이름이구나.”

  ?”

  이전까지 불던 방향의 반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에게서 잎 두어 장을 떨어뜨렸다. 나는 떨어진 잎을 주워 만지작거렸다. 잎맥은 손금처럼 생생하게 갈라져 있었다.

  네가 지어줄래?”

  그래도 되는 거야?”

  그야 아무도 그래준 적이 없는 걸.”

  나는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무언가 조심스레 하지만 바삐 흐르는 것 같았다.

  “..카오루.”

  다시 원래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시원스레 뻗은 그의 가지들이 이리, 저리 흔들렸고 이파리 끝에 맺혀있던 이슬인지 깨끗한 방울 하나가 뺨에 토독 떨어졌다. 카오루가 그렇게까지 말해준 건 그게 처음이었다. 나는 조금 욕심이 났다. 거친 껍질과 종종 흔들릴 뿐인 가지들이 그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밤을 자고 난 뒤 나는 그에게 말했다.

  , 카오루를 만나고 싶어.”

  나는 지금 여기서 너와 만나고 있는 .”

  아냐, 내가 원하는 그런 아니란 말야.”

  그럼?”

  진짜 너를 만나고 싶어. 나무가 아니라.. 나랑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카오루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모든 이야기들이 착각이었나 싶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몸을 짚었다.

  신지.

  .”

  나는 신지사랑해.”

  ?”

  신지나를 처음으로.. ‘해줬으니까. 내게.. 이름을 붙여줬으니까.”

  나는 카오루의 우툴두툴한 피부에 뺨을 갖다댔다. 결국 나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셈이었다.

  내가 너를 안으려면 나는 나무를 떠나야 ."

  그럼 넌 죽는 거야?”

  그의 가장 넓게 뻗은 가지가 흔들렸다. 나는 연인의 손을 잡듯 그의 껍질을 손끝으로 훑었다.

  내가 나무를 떠나길 원하니?”

  카오루….”

  신지, 나는 너의 마음을 묻고 있는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카오루에게 이마를 맞댔다. 잎새 사이로 바람이 휘어지는 익숙한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크게 들렸다. 그는 내 속을 쉽게 읽었다. 나는 별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에 그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도끼를 챙겨 갔다. 카오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지를 몇 번 흔들 뿐이었다.

  할게.”

  , 신지.”

  나는 도끼를 든 팔을 최대한 크게 휘둘러 그의 밑둥을 내리찍었다. , 하고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고 어설픈 도끼질을 몇 차례 더 하자 점점 그의 살구빛 살점이 뜯겨나왔다.

  아아..!”

  쇳날이 그의 안쪽을 찍자 나 모르게 참고 있던 그의 고통스런 신음이 순식간에 터져나와 내 마음 속을 번잡하게 헤집었다. 처음 듣는 음색에 나는 감히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그대로 도끼를 떨어뜨렸다.

  카오루!!”

  신지, 멈추지 말고 계속 해.”

  그치만, 그치만….”

  신지가 원하는 일이라면 나는 괜찮아.”

  네가 괴로워하는 건 원치 않아!”

  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주위는 그를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적막에 잠겼고 그렇게나 흔히 불던 바람도 흔적 하나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카오루에게 닿으려 했지만 그의 말이 나를 멈췄다.

  그럼 괴로워 하지 않을게.”

  뭐야 그게, 나는 울음을 조금 참으며 반문하려 했지만 카오루의 모습은 어쩐지 그 모든 걸 튕겨내는 것 같아 다시 도끼를 집어들었다. 연이은 도끼질은 다른 나무들을 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다. 도끼자루를 쥔 손이 새빨갛게 부을 때까지 네가 사는 나무를 내리찍자 우지끈 소리와 함께 나무가 넘어갔다. 점점 빠르게 고꾸라지는 나무에선 허여멀건한 몸뚱아리 하나가 빠져나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잡으려 양팔을 벌렸다. 카오루의 뭉개질 것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육체는 나에게 쓰러지며 안겼다. 햇빛을 빛나 시리게 반짝이던 잎새들처럼 그의 머리칼은 하얗게 빛났다. 눈대중으로 보기에 나보다 되려 조금 더 큰 것 같은 그의 몸엔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그는 내 가슴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지. 그렇게 입을 벙긋거린 카오루의 눈은 새빨간 색이었다. 그 잘 뻗은 가지에 열매가 맺혔다면 이 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카오루는 갓 태어난 사족보행 동물처럼 비틀대다 제자리에 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게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안긴 날이었다. 그는 요정도 뭣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내가 베어낸 한 그루의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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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 나기사 군. 그건 좀 곤란해."

  "왜?"

  "그, 왜냐니... 남자잖아? 우리 둘 다.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당연이라. 당연. 당연. 당연. 마땅한 것. 생이 있는 것들이 절로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것. 그래, 그런 것이라.

  "아, 나기사 군, 그게..."

  "..."

  "미안해."

  미안해? 뭐가? 나를 보기좋게 찬 게? 당연하다고 아무 생각없이 발음해 뱉어버린 게? 미안, 미안하대. 미안이랜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고는 그대로 신지를 두고 방에서 나와 방향감각도 없이 발끝이 닿는 대로 걸어댔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이 네가 나를 사랑할 거라곤 쉽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치만 난 네가 최소한 시도는 해볼 줄 알았는데. 나를 사랑하려는 시도까진 아니어도 좋았어, 그냥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어도 좋았을텐데. 그걸로도 난 살만하다고 느꼈을 거다. 충분히 살만하다고 자위하면서 유리덮개 안에서 곱게 고개를 떨군 꽃 같은 너를 보고 보고 또 보다가 참을 수가 없어질 때 겨우 향기나 한번 맡았을 거야. 어쩌면 꽃잎을 엄지랑 검지로 만지작거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도 난 너를 꺾지는 않았을텐데. 그 똑 하고 꺾이는 소리는 호수에 물 튀듯 맑고 깨끗하겠지만 그럼에도 난 널 꺾진 않았을텐데.

  그런데 넌 왜 나를 꺾었을까.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신지 군. 나는 내 방에 들어오면서 주술이라도 걸듯 중얼거리다 침대에 털썩 걸터 앉았다. 신지 군. 그렇게나 곤란한 척을 하던 신지 군. 사실은 불쾌했잖아. 결국 불쾌했던 거잖아. 눈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눈물이 흘러 손으로 닦는게 무색할 정도로 나는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왜 미안하다고 했어? 내가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말랬잖아. 신지 군은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거기 그래 그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어떤 일을 저질러도 적어도 나에겐 괜찮다고 했잖아. 신지 군. 신지. 왜. 왜 그랬어. 나는 주먹을 쥐고 벽을 마구 내리쳤다. 이렇게 하면 들릴까? 무슨 일인가 놀라서 내 방으로 찾아올까? 그럴리가. 넌 그럴 깜냥이 안 될 거야. 나는 더욱 세게 벽을 내리쳤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그러고 싶어도 이제 닦지 않는 눈물이 줄줄 흘러서 목이고 마음이고 싹 막혀 꺽꺽 듣기 싫은 쇳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나는 미웠다. 나는 신지가 너무 미워. 그렇게나 바라봤는데, 그렇게나 애타게 바랐는데. 너는 왜 날 항상 밀어내는 거야? 왜 날 여기까지 밀어버린 거야? 네가 걸을 길을 뒷걸음질 쳐가며 마련했는데 결국 내가 디딜 곳마저 없는 곳으로 넌 왜 걸어온 거야? 넌 내 눈을 보며 애매한 미소였지만 어쨌든 웃으며 나를 따라왔잖아. 너는 내가 추락하는 게 보고싶었던 걸까. 신지 군. 끝이 있을지나 모르겠는 곳으로 날 밀쳐내는 와중에도 아름다웠던 네 미안하단 목소리. 아름다웠던 네 눈동자. 나는 벽을 치던 손을 멈췄다.

  "신지 군.."

  보고 싶어. 이젠 더 이상 자신 있게 널 마주하기 어렵겠지. 난 괜찮아도, 넌 보나마나 지금도 죄책감에 싸여 병실 침대 같은 그곳에서 몸을 비틀고 있을 거야. 신지 군은 너무나도 착한 아이니까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몰라. 울고 있는 네 모습을 떠올리면 견딜 수가 없다. 새하얀 시트보다 더 하얗게 질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꺼이꺼이 우는 네 모습은 슬픈만큼 사랑스러워서 나는 항상 너를 달래면서도 조금 짓궂은 생각을 했다. 네가 너를 꼬옥 안아준 건 네가 얼른 마음을 추스리고 울음을 그치길 원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 품 안에서 둥지로부터 떨어진 새처럼 파르르 떠는 네 뜨거운 몸의 진동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인데도 너는 매번 안을 때마다 내 품과 맘에 꼭 차게 들어왔다. 네가 너와 나 사이에 틈을 안 주길래,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치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벽에 머리를 쿵, 쿵 박았다. 아, 나는 이제 살 이유가 없다. 너와 함께하지 못하는 삶이라는 건 그야말로 무가치하다. 나는 머릿속에 어절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를 찧었다. 목까지 찌르르 충격이 내려왔지만 기계적으로 계속 머리를 박았다. 나는 지금 뭘 하는 거야? 왜 이러는 거야? 왜? 뭐 때문에? 누구 때문이더라?

  아, 맞다. 네가 나를 찼지. 새까맣게 타들어가 바닥에 눌러붙은 미련을 긁어내며 나는 생각했다. 죽여버릴 거야. 응, 역시 그게 좋겠지. 아무래도 내가 갖지 못한 신지 군을 그대로 방치해둘 순 없어. 신지 군을 죽이고 싶다. 나를 바라보던 그 모호한 눈빛도, 나를 이리도 휘저어 놓은 내 속의 너도 죽여버리고 싶다. 너를 떠올리면 그렇게 아프고 아렸던 마음도, 너에게 들려주고파 속으로 외던 멜로디도, 어쩌다 가끔 나를 향해 정말 행복한 얼굴로 웃던 네 예쁜 눈코입도 전부 다 찢고 짓이길 거다. 싸그리 잊을 거야. 지금부터 널 싸그리 잊을 거야, 신지 군. 너를 봐도 조금도 설레지 않게, 너를 생각해도 더 이상 울지 않게 너를 없애버릴 거야.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소용 없어. 그 예쁜 얼굴을 잔뜩 우그러뜨리며 빌고 기어도 손 쓸 수 없도록 너를 지울 거야. 그니까. 그러니까.

  나를 꼭 돌아봐줘. 나를, 나만을 향해서 웃든 울든 화내든 한 번만 네 표정을 보여줘. 그건 정말로 아름다울 거야. 기십 번을 죽어도 잊을 수 없을만큼 깊고 아프게 새겨질 거야. 무슨 얼굴을 해도 예쁠, 예쁜, 나의 신지 군. 그치만 넌 역시 행복해야해. 넌 역시 행복해야해. 신지 군은 웃는 게 정말로 사랑스러우니까. 너무나도 사랑스러우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앞으로도 셀 수 없이 화를 냈다 슬퍼했다 증오했다 외로워했다 절망했다 네 행복을 빌게 되어도 너는 변함 없이 사랑스럽겠지. 내가 변해도 너는 미치도록 사랑스러울 거야. 신지 군. 내가 사랑하는 신지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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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

카오신) 성년의 날

2015. 5. 18. 23:19 from 에바

  해가 지고 나서도 여전히 왁자지껄한 캠퍼스가 낯설다. 성년의 날. 그 전까지만 해도 이게 중요한 날인지 어떤지 전혀 감이 안 왔을 정도로 생경한 날이었지만 묘하게 들뜬 분위기에 모두가 흔쾌히 마음을 맡기곤 이런저런 것들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즐겼다. 내 가방에도 과 학생회에서 나눠준 장미 한 송이와 이런저런 군것질거리가 들어있었지만 나는 그닥 기쁘거나 하진 않았다.

  “신지 군!”
  그게, 영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로써 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데이의 중간 쯤 되는 것 같은 무게감이 나에겐 와닿지 않았다. 일률적인 것에 순응하는 건 쉬웠지만 그게 나를 바꾼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성년, 어른, 하는 것들은 조금 애매해서 나는 받아든 꽃마저도 별로 예뻐 보이지 않았다.
  “신지 군.”
  나는 내 팔이 붙들리고 나서야 인기척을 느끼고 이어폰을 뺐다. 나를 붙잡은 그 하얀 손은 어정쩡하게 이어폰을 들고 있는 내 손을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감싸쥐었다.
  “아, 미안해, 카오루 군. 잘 못 들었어..”
  “괜찮아.”
  “근데, 이건...?”
  날이 날이라, 카오루는 빙그레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 걸음을 맞췄다.
  “학교에서도 줬지?”
  나는 끄덕였고 그는 나를 더 자세하게 보려는 듯 조금 더 고개를 틀었다가, 입을 한번 삐죽하고, 다시 정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동기들하고 약속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연락 안 했는데, 아까 우연히 아스카랑 만나서 물어봤더니 아니라고 하길래.”
  “그냥.. 좀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술 먹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니까.”
  “맞다, 신지 군은 술자리 별로 안 좋아했지.”
  평소 작별 인사를 나누던 횡단보도에 멈춰섰지만 카오루는 방향을 틀지 않고 그대로 내 옆에 섰다. 학교 근처에 있는 내 자취방까지 그와 같이 가는 일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이걸 ‘바래다준다’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나는 쉽게 얼굴이 뜨거워지곤 했다. 더군다나 오늘 같이, 꽃이라도 선물 받은 날은. 나는 미처 말하지 못한 비밀이라도 있는 꼬마애처럼 발끝을 비비적거렸다. 곧 초록불이 켜졌고 우리는 횡단보도를 서서히 건넜다.
  “조금 우스운 얘기긴 한데.”
  “응?"
  “성년이 된 기분, 어때?”
  나는 깜빡깜빡 점멸하는 초록불의 잔상을 느끼며 묵묵히 걸었다. 그도 함께 묵묵히 걸어줬다. 우습다기보단, 역시 조금 애매한 이야기다.
  “실은.. 잘 모르겠어. 성년이라든가 어른이라든가. 성년의 날이 됐다고 뭐가 달라진 걸지.. 그냥 말 뿐인 거잖아, 사실은."
  “그런가.”
  평소답지 않게도 카오루는 나의 푸념에 얼추 수긍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너라도 아닌 건 아닌 거겠지. 나는 장미를 감싼 비닐을 괜시리 부스럭부스럭 만졌다.
  “카오루 군은 어땠어? 작년 성년의 날 때.. 축하도 많이 받고 그랬을 거 아냐.”
  “나도 크게 다를 건 없었어. 올해처럼 작년에도, 아니 작년처럼 올해도 학생회 애들이 이런저런 선물을 나눠줬고, ‘안녕’, ‘밥 먹었어?’, 같은 인사 대신에 축하한다는 얘길 했고. 그 땐 그냥 때가 돼서 어른이라 한다고 생각했지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변한게 있었다고 생각해. 그게, 짧다고 한다면 짧을 수도 있지만, 꽤나 여러 날을 살고 맞은 성년이잖아. 그 지난 날들이 당장 성년의 날에는 아니더라도 나를 여기까지 오게끔 한 것 같달까. 이렇게 변하게끔 했달까.”
  카오루는 조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는 어느새 도착한 자취방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처음엔 그게 싫었어. 변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나도 모르는 의미로 내가 변하는 게 불쾌했어. 그치만..”
  나는 숨을 조금 삼켰다. 카오루가 자신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건 묘한 느낌이었다.
  “변한다는 건 불가피한 일이기 전에 해볼만한 일 같아. 그게.. 결국은 나의 지난 날들을 모아 또 다른 나를 탄생시키는 거니까. 신지 군도 마찬가지일 거야.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날들을 생각한다면 신지 군에게도 오늘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카오루는 내 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시선을, 돌릴까. 나는 처음으로 그의 눈을 바로 봤다.
  “이렇게 변한 신지 군이 아름다워.”
  카오루는 내 귓바퀴를 엄지로 조심스레 쓸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흠뻑 들이마셨다.
  “카, 카오루 군..”
  “향긋해. 장미나 향수 같은 건 다 일시적인 냄새일 뿐이야. 그치만 신지 군의 냄새는 신지 군 자신에게서 나오는, 지난 열아홉 해 동안 성장해온 내음이야.”
  성장, 한 건가. 그 붉은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만약 내가 정말로, 정말로 성장했다면, 앞으로도 성장한다면, 그건 아마 네가 곁에 있기 때문일 거다. 네가 그 눈으로 나를 봐주기 때문에, 네 두 눈에 내가 있기 때문에.
  “신지 군을 사랑해.”
  나는 카오루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라가는 입술을 앙 물었다. 카오루는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오늘, 안 받았지?”
  “응?”
  나는 내 허리를 감싸쥔 카오루의 손에 이끌려 그의 품에 안겨들어갔고 그는 나에게 그대로 입을 맞췄다. 오늘 내내 캠퍼스를 수놓던 붉은 빛 향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내 입 안에 가득 퍼졌고 나는 그의 옷소매를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벌써 밤이 더워지는 때가 왔나 봐, 나의 성년의 밤은 조금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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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드레, 또 비가 내린다. 비가 창문이고 나무고 도로고 가리지 않고 흠뻑 적실 동안 너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그게, 지금 창 밖으로 보이는 온 세상보다 훨씬 젖어있던 네 두 눈이 자꾸 마음 한 켠에 데굴데굴 굴러다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렇게까지 시간을 흘려버릴 줄 알았으면 미안하다고 빨리 말할 걸. 나는 매일 밤을, 아니 아주 조금 과장을 보태 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 종일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너 때문에, 아니 나 때문에.

  흔한 연인들의 다툼처럼 사소한 일이 원인이었다. 누구 하나가 살짝만 굽혀서 미안해, 그 발음도 쉬운 세 글자를 말했다면 끝났을 일이었다. 아, 나는 왜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가지고. 조금 인상을 쓰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길 느릿느릿 꺼내자 네 숨결이 조금씩 떨려왔더랬다. 그 때 멈췄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너를 안쓰럽다 생각하면서도 기어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고 결국 네 눈에서 투명한 뭔가가 흐르는 걸 보고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중인지를 알게 됐다. 미안. 그제서야 소리로써 나온 그 말은 내가 아닌 네 입에서 튀어나왔고 나는 그대로 가버리는 네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질 때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돌아갔다. 그 날은 그렇게 보냈다. 그 다음 날과 그 다음 날은 조금 화가 났다. 화난 티도 내지 않는 네가 답답했다. 그 다음 날부터 꽁한 마음이 조금씩 풀리더니 5일 째 되는 날엔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울먹일 정도로 너에게 미안했다. 6일 째엔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젠 네가 예전에 보내줬던 네 시간표를 찾아내 너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여드레, 오늘도 그 때처럼 비가 내렸고 나는 우산 두 개를 챙겨 하나는 쓰고 하나는 가방에 넣고 네 수업이 끝나기를 수업 종료 30분 전부터 기다렸다. 괜히 문에 귀를 갖다대보기도 하고 인상을 팍팍 쓰며 문 틈새를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싸늘하게 젖은 네 눈만 생각나서 나는 한숨을 폭폭 쉬곤 벽에 기댔다. 잠을 통 못 자서 그런지 서서 졸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하여간 널 기다리다 별 쇼를 다 한 것 같다. 그 중에 가장 어처구니 없는 건, 그렇게 혼자 흔들, 흔들거리다 강의실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에 섞인 널 놓쳤다는 거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눈으로 네 뒷통수를 찾아헤맸다. 겨우 발견한 익숙한 뒷모습은 시끄러운 주위를 한껏 무시하려 애쓰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나는 허겁지겁 네 뒤를 따라갔다.
  스토커도 아니고 말야, 나는 네 당당한 연인인데 그렇게 부르고 부르던 네 이름도 못 부르고 네가 걸어간 그 자욱 그대로를 밟았다. 너는 걷는 것도 예쁘네. 살짝 발끝을 모으며 안짱걸음을 걷는 네 다 닳은 운동화 뒤축을 보니 돌아오는 생일엔 커플 운동화를 선물해 볼까 싶었다. 튀는 건 싫어하니까,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게 좋겠지. 아차, 나는 조금 느려진 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너와의 거리를 적당히 좁혔다. 항상 함께 걸을 때면 손을 잡고 걷더라도 네 쪽이 한 발자국 반 정도 뒤쪽에서 걸었었다. 그때 내 옆-뒷모습을 보던 네 기분은 어땠으려나. 너는 내 걸음걸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을까.
  그때 네가 뒤를 돌았다. 나는 깜짝 놀라, 왜 그랬을까, 입을 가리곤 벽 뒤에 숨었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올랐다. 들고 있던 우산은 이미 엉망으로 방향이 뒤틀려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고대로 맞았다. 뭐야, 왜,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사람이 살다가 싸울 수도 있고 화낼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는 건데, 나는 그게 너라고 하면 당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 눈을 질끈 감고 발을 동동 굴렀다.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네가 울지 않았으면, 네가 행복했으면. 나로 인해. 그렇게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 채 저어기서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있는 네 얼굴이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른다. 저기 있잖아, 잡을 수 있잖아. 나는 기울어진 우산을 바로 쓰고 다시 길가로 나왔다. 조금씩 잦아드는 빗속에서 나와의 거리를 벌려가는 네 뒷모습이 나를 부르는 것 같다. 가자, 지난 여덟날 동안 네가 나랑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당장 잡아야겠다.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일단 네 맑은 두 눈을 보면서 미안하다고 또박또박 말해야지. 그리곤 네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말할 거야. 정말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에서 뭔가가 자꾸자꾸 밀고 올라와 내 눈으로 흘러넘칠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내가,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안 될 거야. 나는 점차 개어가며 모습을 드러내는 하늘이 비쳐 구름빛을 띠는 길바닥을 찰박찰박 뛰었다.

  “신지 군!!!”

  내 목소리에 네가 뒤를 돈다. 조금 놀란 것 같더니, 뭐야, 웃잖아. 역시 너도 그랬나보네. 우산 그냥 하나만 챙겨도 됐을 걸. 나는 네 손을 덥썩 잡았다. 빗기운에 차가운 네 손을 그 자리에서 녹일 기세로 꼭 쥐었다.

  "신지 군, 정말..."
  "고마워, 카오루 군."

  네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너는 몰랐겠지만 조금 운 것 같다. 비는 여드레 동안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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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

5월 카오신 배포전 웨a2 '사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카오신 소설 <그 날의 너를 위해서> 인포메이션입니다.

기면증이 있는 신지가 어느 날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죽는 꿈을 꾸고,

그 다음 날 자신의 꿈에서 죽었던 카오루를 만나며 시작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수위X / A5 / 후기 및 공백 포함 78p / 나눔명조 10pt 이며, 회지 가격 8,000원입니다.


아래는 샘플입니다. (일부 문장 변경될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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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백색의 하늘이 도시를 무덤덤하게 짓누르던, 그야말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날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것처럼 답답한 공기에 문 밖으로 나가고픈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지만, 때마침 받아둔 약이 저녁에 먹을 양만을 남겨놓고 똑 떨어져 나는 하는 수 없이 검은 장우산을 한 손에 들고 집을 나섰다.

   모다피닐, 꽤나 비싼 약이었다. 덕분에 학생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기 무색할 정도로 몇 번이고 휴학계를 냈더랬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르륵 잠드는 주제에 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치였지만, 그건 내 스스로가 살면서 진심으로 갈구한 첫 번째 욕심이었기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의 욕심엔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응급실 앞 움푹 파인 아스팔트에 물이 조금 고여있었다. 이제 비가 오려나, 얕은 웅덩이가 조금씩 흔들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인 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몇 번 젓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길바닥에서 곯아떨어지면 항상 꽤나 곤란한 일이 생기곤 했다. 놀란 목소리들, 고함들, 가끔은 울먹거림까지 내 귓가에 웅웅댔고 나는 선택하지 않은 잠 마저도 편히 맞이할 수 없었다. 괜시리 기지개를 켜며 걸어가는데 무언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내 자신이 쓰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 하고서야 나는 뒤를 돌아봤다. 앰뷸런스에서 급하게 들것이 내려왔고 그 위에는 창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누워있었다.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눈처럼 하얗게 질려있는 그가 너무나도 불안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응급실로 그를 바삐 실어나르는 간호사들의 뒤를 따랐다.

   흰 들짐승들에 둘러싸인 것마냥 힘없이 실려나가던 그가 한 침대 위에 뉘여졌다.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이런저런 장비들을 준비하는 와중에 난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그래, 홀린 것처럼 그의 고개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보호자세요?”

   , 아뇨.. 저는….”

   그럼 왜 방해되게 여기 서있는 거냐고 묻는 것과 거진 마찬가지로 간호사의 태도는 무심했다. 가야 되는데. 얼른 약이나 처방 받고 내 방 침대 위에 누워야 하는데. 피곤하다. 아마 5분 내로 쓰러지겠지. 나는 조금씩 숨을 몰아쉬며 그의 하얀 손을 잡았다.

   비키세요.”

   관계 없는 분은….”

   “..신지군.”

   어느새 눈을 뜬 그의 손엔 힘이 애처로울 정도로 살짝 들어가 있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미처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는 힘겹게 숨을 마시고 내쉬며 축축한 붉은 눈동자로 마지막이라도 되는 양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역시 와줬구나.”

   저기, 나는….”

   신지군이… 여태까지 있어줘서, 정말로.. 정말로 행복했어. 내가….”

   그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탁한 숨을 내뱉었다. 나는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 그만해…. 제발 무리하지마.”

   아니, 내가 무모했어…. 난 내가 신지군한테, 줘야, 했던 걸.. 도로 받아버렸어…. 미안해….”

   안녕, 그는 겨우 그 입모양을 하고는 얼굴 가득 웃었고 나는 어쩐지 너무나도 슬퍼져 그대로 주저앉았다. 침대보를 움켜쥐고 가장 서러운 이처럼 엉엉 울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다신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도 속상했고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아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어느 새 잠들었을까, 나는 굳어버린듯 무거운 눈을 겨우 떴다. 익숙한 이불, 익숙한 냄새, 익숙한 실내 온도. 내 방 침대 위에서 나는 손톱을 세워 손목을 긁었다. 한참을 긁으니 조금 불쾌한 통증과 함께 벌겋게 자국이 남았다. 쓸모없는 놈. 나는 모다피닐을 처방 받기 위해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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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표지 이미지입니다.





본 회지는 따로 선입금 예약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머더래빗 :

용필옵빠의 Bounce 들으면서 딱 20분 동안 썼음

의미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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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귀자.”

꽤나 쉬운 이야기인가 봐, 너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그에 반해 내 속은 지축이라도 뒤흔들리는듯 콰광, 콰과광 하고 난리부르스를 췄더랬다.

눈에 띄게 잘 빚어진 얼굴은 아니었지만 언제부턴가 계속 언저리의 기억에서 맴도는 입매였다. 갓 피어난 꽃잎처럼 때 하나 타지 않은 입매는 퐁, 하는 소릴 내며 벌어질 것처럼 예쁜 모양이었다. ㅇㅇ야, 하고 그 입매를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며 내 이름을 소리내어 발음할 때면 나는 아방한 남고생처럼 시뻘건 얼굴로 모른척을 했다.

그 말인 즉슨 나는 너를 처음부터 좋아했다는 뜻이다.

소위 말하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어도 태가 나는 사람이었다. 수업에 늦어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그 깨끗한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것마저도 상쾌했다. 매번 허겁지겁 밥을 먹느라 사래가 들리는 것도, 일주일에 한번은 꼬박꼬박 넘어지는 것도,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서 이어폰을 찾는 것도 전혀 한심하지 않았고 그저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신기해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내 모습이 한심할 뿐이었다. 너는 내게 따로 주어진 생명 같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망울도, 수줍어 달콤하던 네 입술도 내겐 꿈만 같아 나는 매일 아침을 두웅실 뜬 것 같은 기분으로 맞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네가 사귀자고 내게 말이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로 천재지변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 실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안절부절하며 네 눈치를 살폈다. 고백한 건 너인데 눈치는 내가 봤다고! 나는 고개를 떨궜다. 빨리 그러자고 얘기해. 빨리 좋다고 대답해. 박력있게 끌어안든 얼굴 한가득 웃어주든 뭐라도 해. 나는 나를 채근했지만 내 손은 뭐에 감전이라도 된듯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이걸 어쩐다, 싶은 순간에 네가 내 손을 잡았다.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손을 살짝 틀어 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내 손가락들을 하나씩 끼워 깍지손을 잡았다. 뜨겁지 않아서, 오히려 조금 시원해서 네 손을 잡으면 기분이 좋다.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을 때 받는 시원한 생수마냥 너만의 체온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전신에 퍼진다. 아, 이거다. 이제서야 마른 뿌리에 기다린 봄비가 내려 무언가 돋아나 빛을 보는 기분이 든다. 선생님에 명령에 눈을 감았다 몰래 실눈을 뜨는 개구쟁이처럼 나는 찡그리며 천천히 눈을 떴고 너는 박하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 이건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있을 수 없을 줄 알았던, 필연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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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

3월 28일 토요일 서코 K05 쵱캐★프라이드 최종 인포입니다.


1차창작BL 캠퍼스팸 연작


구간 <별이 빛나는 밤에>

인포: http://murderabbit.tistory.com/7


<10:31>

인포: http://murderabbit.tistory.com/20


선입금 예약 안내 페이지: http://murderabbit.tistory.com/22 

-> 마감되었습니다!


2차창작 신세기 에반게리온 카오신 (카오루X신지) 신간 <Where You Stand>

인포: http://murderabbit.tistory.com/23



감사합니다!

Posted by 머더래빗 :

3월 서코 토요일 K05 '쵱캐★프라이드'에 나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카오신 소설 <Where You Stand> 인포메이션입니다.

피아노 전공자이자 부잣집 아들내미(...) 나기사 카오루와

콘서트 예매처에서 티켓 배달원으로 일하는 이카리 신지 이야기입니다.

수위X / A5 / 후기 및 공백 포함 60p / 나눔명조 10pt 이며, 회지 가격 7,000원입니다.


아래는 샘플입니다. (일부 변경될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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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다른 소음이 들리지 않는 아파트 복도에 초인종 소리가 길게 울렸다. 몇 초 후 현관문이 열리고, 깨끗한 티셔츠에 다리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까만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남자는 얼굴을 비비며 문틈 새로 얼굴을 비쳤다. 문 밖에 서있던 남자가 입까지 꽁꽁 싸맨 목도리를 내리고 짧게 숨을 내뱉자 흐릿한 입김이 나왔다.

  “누구세요?

  “나기사 카오루 씨 티켓 배송 왔습니다.

   코끝이 빨개진 남자가 찬 바람에 조금 거칠어진 손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집 안에 있던 남자가 티켓을 받아 들었고 잠시 스친 배달원의 손끝은 섬짓하리만치 차가웠다. 티켓을 건낸 남자는 주섬주섬 힙색에서 작은 기계를 꺼냈다.

  “아, , 여기에 싸인이랑.. 수령하시는 분 성함도….

  카오루는 티켓을 받은 뒤 전자펜으로 화면에 지익 수평선을 그었고 배달원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카오루를 올려다 봤다.

  “뭐 문제라도?

   , 아뇨, 아뇨, 죄송합니다. 배달원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기계를 돌려받은 남자는 힙색에 허겁지겁 물건을 넣고 모자를 어줍잖게 고쳐쓰고 다시 목도리를 코밑까지 올렸다.

  “그, 그럼...

  “저기요.

 

   뒤돌아 문을 열던 남자가 머뭇거리며 카오루를 돌아봤다. 그가 목도리를 내리고 입술을 열었지만 이번엔 입김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오해 많이 받아요. 괜찮습니다.

   “네?

   “이름 말이에요.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기라도 하듯 배달원은 다시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죄라도 지은 것처럼 카오루의 집에서 서둘러 빠져나왔다. 티켓을 전달하고 서명을 받는 약 3분 가량의 아주 짧은 시간만이 둘 사이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시작한 지 약 두 달 쯤 된 아르바이트생 이카리 신지에게, 한 달에 못해도 두 번은 티켓을 배송받는 우수회원 나기사 카오루는 어쩐지 조금 어려운 고객이었다. 다음엔 더 말을 아껴야지. 조금 더 빨리, 떠나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은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아 이카리 신지는 나기사 카오루의 집에 다시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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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표지 이미지입니다. 표지는 숭늉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본 회지는 따로 선입금 예약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머더래빗 :

캠퍼스팸 연작 그 두 번째

새내기X학부조교 1차 창작 BL소설 무수위본 <10:31> 인포메이션입니다.

'조도마대학교' 신입생인 '신잎새'와 학부조교 '조교연'이 만나게 되는 내용의 캠퍼스로맨스물입니다.

전작 <별이 빛나는 밤에>와 일부 내용 연결되어 있지만, 그냥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A5 / 속지 및 후기 포함 66p / 나눔명조 10pt 이며, 회지 가격 6,500원입니다.


아래는 수정된 샘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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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에 그을리는 것 같은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는 또 다시 신호에 걸려버렸다. 아씨, 이럴 줄 알았으면 10분만 더 일찍 알람 맞춰둘 걸. 나는 ADHD라도 있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홈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그래 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만 말해줄 뿐이었다. , 네가 설령 10분 일찍 일어났었더라도 이미 7분 정도 늦어진 상태잖아, 그러게 누가 아까 칫솔 물고 꾸벅꾸벅 졸으래? 누가 보이지도 않는 양말 뭐 신을지 3분 씩이나 고민하래? 내가 빨리 흘러간 거라고 내 탓하면 섭하다? 한바탕 욕을 먹은 기분에 나는 턱을 괴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버스를 앞질러 걸어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쫓았다.

   수업은 날이 갈 수록 재미가 없어졌다. 재밌을 줄 알고 선택한 전공과목도 지겨운데 교양과목, 그것도 이과 수업이라니, 당최 강의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처럼 지각은 물론이거니와 출석체크만 한 뒤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진도가 뒤쳐지기 시작하자 상황은 더 악화되어갔다. 새내기의 몇 안되는 자산인 시간을 흥청망청 쓴 결과 나는 결국 3월이 미처 다 지나가지도 않은 시점에 출결 경고 문자를 받았다.

   내가 생우사, 그러니까 생명과우리사회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출결 때문에 F를 맞아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을 줄 알라는 누나의 협박이 첫 번째다. 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보란듯이 회사에 취직한 누나는 동생인 내가 밟아야 할 캠퍼스라이프를 몸소 실천해보였다. 누나, 난 누나랑 학교도 다르고 학과도 다르잖아. 들어가면 다 똑같아. 난 군대도 가야하는데. 그래서? 따위의 승패가 정해진 실랑이를 지켜보신 부모님은 나에게 누나의 것과 비슷한 대학생의 생활패턴을 내가 입학하기도 전부터 기대하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 조교 때문이다.

   그 사람은 꼭 우리 누나 같다. 아니, 누나보다 더 하다. 나무껍질처럼 메마른 인상답게 그는 언제나 여유 없는 손짓으로 출석부를 두어 장 넘겨 내 이름 옆에 체크 모양으로 지각 표시를 했다. 그 체, , 표시에 나는 뛰느라 차오른 숨을 꿀꺽 삼켜버렸고 연이어 내 자존심과 의지 그리고 고개까지 후미지게 꺾여버렸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에게 짜증나는 지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기미 없이 지각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내 모습이었다. 이상하지. 매번 그 메마른 손을 보면 잡아주고만 싶었고 결국엔 그 손을 보고 싶어서 지각을 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그 손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늦을 수밖에 없다고 해야하나. 희한한 방식으로 매저키즘이 발현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 스스로도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조교를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대라니, 처음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내가 자기랑 얼마나 많이 봤다고 나한테 기대 같은 걸 거는지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기대가 싫었다. 나에게 기대따위의 단어를 사용하는 건 우리 집 식구들로 충분했다. 그런데도 내가 드랍하지 않고 바득바득 이 수업에 기어들어가는 건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조교님을 좋아하고 그 사실을 빨리 인정했다. 아마 그 사람도 곧 눈치챌 것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도 날 좋아해줄지도 모르지. 그치만 그 사람하고 이런 식으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런 척박한 상황이 아니라 조금 더 둥글둥글한, 그래, 동아리라든가 과 선후배사이라든가 하는 사적인 상황에서 만났어야 했다. 그 사람이 과 선배였다면 내가 수업을 짼다고 해서 나에게 그렇게까지 실망하진 않았을 거였다. 오히려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순간 마음이 답답해졌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학교 근방의 풍경이 어지럽다. , 수업 가기 싫어. 미토콘드리안지 뭔지 귓구멍에 쑤셔넣기도 싫다. 누군가의 삶에 생명과학이 필요하리란 건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게 내 삶은 결코 아닐거라고, 지금 판단하는게 그렇게 괘씸한건가.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이유가 너무 불순, 한가. 순간 정신 차리라는 듯 핸드폰이 부르르 떨린다. 뭐야, 뭔데?

 

   [야 너 왜 안와]

   [너 벌써 1차 뜨지 않음??]

 

   알아. 안다고. 그리고 아직 6분이나 남았다고. 내가 늦든 말든 너희들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땡땡이를 치기 시작한 때? 수강신청을 한 때? 그도 아님 당신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이렇게나 엉망일 거라면 당신이 문앞에서 지키고 있는 강의 같은거 듣지 않았을텐데. 아니, 이렇게나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밖에 나를 드러내지 못할 걸 알았다면 첫 수업 때 드랍했을텐데. 나는 떨어지는 의욕을 붙잡으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야 한다고 계속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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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표지 이미지입니다.



선입금 예약 안내는 빠른 시일 내로 공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머더래빗 :

의불

2015. 3. 10. 03:52 from 기타/이도저도 아닌

  교복을 입고 맞는 마지막 날엔 꼭 사람들이 전부 다 빠져나간 학교를 보고 싶었다. 부러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았던 나는 끝내 야트막한 건물들 너머로 해가 떨어지는 것까지 빈 교실에서 구경했다. 진한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교실문으로 향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시커먼 놈들이 웃고 떠들고 싸우고 욕하던 좁아터진 교실이 이렇게나 휑하게 느껴질 줄은, 직접 느끼기 전엔 몰랐었다. 특히 네 자리는 도려낸듯 허전했다.

  멍청해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넌 꽤나 똑똑한 놈이었다. 얌체같은 애들이 매일같이 숙제를 베껴가도 넌 웃으며 노트를 빌려줬고 가끔 철없는 놈들이 시기어린 모진 말을 내뱉어도 조금 머쓱해 할뿐 그러려니 하던, 말 그대로 등신 같은 놈이었다. 마음을 넓게 써서 그랬는지 넌 아픈 곳 하나 없이 무탈하게 그 힘든 1년을 이겨냈고 결국 원하던 곳에 덜컥 붙어 학교의 자랑이 되었다. 수능 이후로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입에 발린 칭찬을 줄곧 들었지만 난 그게 그닥 기쁘진 않았다. 너와 비교가 되어서도 아니었고 네가 아무 입에나 오르내리는게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낄 데가 없는 것 같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좋아한다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괜히 네가 앉았던 자리를 똑바로 정리하고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다 걸어내려와 건물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익숙한 실루엣이 튀어나왔다. 참나,

  "어처구니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찾았는데! ㅇㅇ한테도 전화하고 ㅇㅇ한테도 톡했는데 다 모른대잖아!"

  "여깄는 줄은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래서 왜?"

  "그냥 네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아냐, 아니다.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아, 바보 같은 새끼. 등신 새끼. 너는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것 같은 얼굴로 다 풀어헤쳐진 웃음을 지었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웃음이다. 머저리 같은 놈. 나는 양팔을 가능한 크게 벌렸고 너는 나를 꽉 차게 안았다.

  "졸업 축하해."

  "너도. 축하한다."

  "꼭 연락할게."

  "카톡 씹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나를 한가득 끌어안은 네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답답했다. 알 수 없는 뭔가가 내 호흡을 밀어내며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게 꼭 앞뒤 가리지 않는 너와 같아서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어? 너 울어? 왜 울어?"

  "미친놈아 안 울어!"

  "야, 눈물 범벅인데 아주?"

  "너 뒤질래?"

  "너 그렇게 험하게 말하면 여자애들이 싫어한다?"

  "상관 없어."

  너는 나를 안은 팔을 풀고는 또 멍청한 얼굴을 했다.

  "나한테도 험하게 말할 거야?"

  "..왜 이래 징그럽게."

  "ㅇㅇ아."

  너는 다시금 나를 폭 끌어안았다.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드디어 내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만한 틈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앞으론?"

  "앞으로도."

  이대로 있어주라. 너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럴 거지?"

  "기브 앤 테이크."

  "당연하지."

  "그럼 생각해 볼게."

  "ㅇㅇ아."

  "왜 자꾸 불러싸대?"

  "졸업 축하해."

  "아까 했잖아."

  "좋아해."

  나는 네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모두가 다 빠져나간 학교가 보고 싶었다. 마지막엔 전부 비우고 싶었다. 거기엔 당연히 너도 있을 줄 알았다. 사는게 사람 맘대로 안 되네. 그래, 실은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나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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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