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카오신) 짧뻘

2015. 1. 2. 04:49 from 에바

매우 짧은데다가 의식의 흐름

세계관 개무시

캐붕주의

원작 몰이해 주의

널 지우려 해 들으면서 씀

-------------------------


  너만은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나의 말을 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애매한 미소로 웃어넘겼더랬다. 좋아한다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되려 너는 고심했다. 너는 이것저것 궁금해했지만 목적을 묻진 않았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을거라고,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너를 잊는 것은 일면 합리적일진 모르나, 내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님에는 분명했다. 그래서 다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조금이라도 흐려질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나는 몇번이고 네 연약한 미소를 상기하며 영겁의 시간을 보냈다. 그럴수록 너는 희미해져갔다. 가끔씩 잡던 네 손은 답지 않게 차가웠다. 그렇지만 가장 차가웠던 것은 그때 마지막으로 나를 움켜쥔 대리자의 손이었다. 그치만 네 눈시울은 뜨거웠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안녕, 나는 - 몇번째였더라 - 너와 잠정적으로 이별했다.


  무시로 밝은 지구의 위성을 등지고 너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는 것은 이미 나에겐 목표가 아닌 과정의 일부였다. 어쩐지 더 수척해보이는 너는 또다시 타인이 보낸 비를 맞고 있었다. 이번엔, 이번엔 완벽하게.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 너를 보며 나는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또 억지를 부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이랄 것도 없이, 모든 것이 소멸한 원점의 방에서 네 보잘 것 없는 육신이 숙명에 제 남은 의미를 맡길 때 나는 또 다시 찾아온 실패 속에서 '다음에는'이라는 무책임한 네 글자를 힘겹게 씹어삼켰다. 하지만 언젠간 끝을 내야겠지. 내가 다시 찾아오지 않아도 될 상황이 되어야만 네가 진정으로 웃을 수 있을테니까. 그 때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하노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하늘에 흩뿌려진 수많은 별 중 하나가 아닌 자신만의 빛과 궤도로 존재하는 별을, 들판에 한가득 핀 수많은 꽃 중 하나가 아닌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로 살랑이는 꽃을 닮은 너에게, 나는 온당한 상대로서 남을 수 있을까.


  너를 처음 만났던 곳. 희망과 절망이 보기좋게 엉켜있던 그 땅에서 너를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고 싶었다. 과한 욕심으로 끝끝내 너와 함께 했지만 이건 아니란 걸 깨닫기엔 배드 엔딩이 조금 더 발이 빨랐다. 한도 없이 되돌아걸으면 너를 또 만날 수 있겠지. 얼마나 더 가야할지 알 수 없어도 좋다.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어, 신지군. 신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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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리퀘인듯 리퀘 아닌 리퀘 같은 연성

호소미치조 현대물

이 글을 리써님에게 드립니다.

------------------------------


 불쾌한지 경이로운지 모를 폭설이 내린지 이틀 째 되는 밤이었다. 소라는 하필 이렇게나 추운 날에 자신을 불러낸 스승이 귀가 간지러워 벅벅 긁을 정도로 푸념을 늘어 놓으며 길을 걸었다. 집보다 그의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 정도로 그와 함께 하는 때가 많았지만, 오늘은 일년에 몇 차례 밖에 없는 휴가 중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얼마만에 온 휴일인데 뉴스는 6년 만의 한파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나 지껄여댔고 기분이 상한 소라는 집에 틀어박혀 절대로 나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을 한지 54시간 만에, 스승인지 뭔지 하는 아저씨는 기어코 그를 불러내고야 말았다. 목도리에 장갑에 마스크에, 소라는 중무장을 하고 빙판길을 나섰다.


  "아, 소라군!"


  옷을 두껍게 껴입었을텐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라보이는 그의 스승이 가느다란 손을 흔들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바보 같긴. 역 안에서 기다리라고 문자를 보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바쇼는 몸을 달달 떨면서 역 밖에서 그를 맞이했다. 소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인사를 건넸다.


  "6년 만의 한파라는데, 멍청하게 밖에서 기다릴 건 뭡니까. 몸도 부실한 중년 주제에."

  "부실하다니! 소라군이 내 짱짱 멋진 이두박근을 못 봐서 그러나 본데-"

  "그런 소리 할거면 추워서 덜덜 떨지나 마시죠."

  "웬일로 걱정해주네."


  소라군이 걱정해 주는건 오랜만이야, 바쇼는 배시시 웃었다. 오랜만이라니, 그 전에도 당신을 걱정한 적은 없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소라는 참았다. 차가운 것은 지금 내리는 눈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과거의 일을 복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걸 자신도 알고 있다는 듯 바쇼는 조그맣게 웃어보였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요?"

  "아, 이거 전해 주려고."


  바쇼가 후줄근한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소라는 꽤나 묵직한 봉투를 받아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책의 가제본인 듯 했다.


  "이게 뭡니까?"

  "왜, 저번에 동료 작가가 신작을 하나 낸다고 했지? 그 책 가제본이야."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소라군, 그 친구 좋아하잖아."


  하라는 교정은 안 보고 인터넷으로 그 작가 블로그 읽고 있는 거 다 뽀록 났지롱- 입을 쭉 내밀고 그를 놀리는 바쇼를 무시하고 소라는 봉투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기분이 나빴다. 딴짓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킨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바쇼가 알고 있다는 것보다, 자신을 위해 바쇼가 노력을 했다는 것보다, 그가 '아직도' 자신을 신경써준다는 사실에 소라의 안에선 울컥하고 열 아닌 열이 치밀었다.


  "어째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이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뭐어? 그 친구한테 다 이를거야~"


  바쇼는 어린애처럼 말도 안되는 땡깡을 부렸다. 아직도 철이 덜 들었군, 소라는 서류봉투로 바쇼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아!! 소라군 너무하는 거 아냐?"

  "이거 하나 주려고 불러낸 겁니까? 이 추운 날에?"

  "그치만~ 소라군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주고 싶기도 했고.. 휴가 기간에 읽으면 맘 편하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잖아?"

  "언제까지 절 신경 쓰실 겁니까?"


  싱글벙글 웃던 바쇼의 얼굴이 일순간 짓밟혀 녹아버린 눈처럼 허물어졌다. 그러나 곧 바쇼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는게 당연하지. 내가 총애하는 제잔데."


  거짓말. 차마 내치지 못하는 옛 정인이겠지. 소라는 입술을 깨물며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들어가겠습니다. 밥 먹자거나 커피 마시자거나 떼 써도 소용 없어요."

  "알아."


  그렇게 말하는 바쇼의 얼굴은 체온 때문에 녹은 눈 때문인지 조금 습해보였다. 더 이상 흔들리면 곤란하다. 그동안 잘 견뎌왔다. 행복했던 날들이 꺼내고 싶지 않은 그 옛날의 무언가로 변색해버린 후에도 그들은 화풀이와 속앓이를 지면에 해가며 각자의 업에 충실해왔다. 점점 작아져 가는 것만 같은 은사의 어깨를 감싸고 억지로라도 안고 싶은 적도 부지기수였지만 그럴 때마다 스승의 시집을 한 페이지 씩 찢어내는 것으로 그 파괴욕을 상쇄했다.


  "휴가 잘 보내고 다음 주에 봐, 소라군."


  어느새 서너 걸음 쯤 물러서있는 바쇼가 소라에게 인사를 했다. 소라는 가볍게 목례를 하곤 바로 뒤를 돌아 스승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힘이 실린 걸음이 왜인지 점차 느려졌고 소라는 결국 그 자리에 멈춰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다시 꺼냈다. 가제본을 펼쳐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는데 자그마한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소라는 눈에 젖어가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둘이서 보았던 눈, 올해도 그렇게 내리었을까.


  소라는 홱 몸을 돌렸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종종걸음으로 돌아가는 바쇼의 뒷모습이 흐릿했다. 때를 잘못 탄 것이겠지, 당신도 나도, 6년 만의 한파보다 더 놀라운 인과로 우리가 만나고 헤어졌음에도 여전히 함께라는 사실도. 눈발이 언젠가 걷히고 기온이 올라가는 계절이 오면 당신과 나의 마음에도 무언가가 피어나긴 할까. 소라가 봉투를 끌어안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날은 밤새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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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싱/공원) 과제기간

2014. 11. 20. 23:22 from Campus/쪽글

  저녁 8시의 캠퍼스는 꽤나 조용했다. 과제기간이라 남아 있는 학생들의 수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큰 소리라든가 웃고 떠드는 소리 등은 쉽게 들려오지 않았다. 국문과 예원이 마주 앉아 각자의 전공서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인문대 건물 5층의 강의실도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와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예원이 손에 쥐가 나도록 쓰던 것을 멈추곤 기지개를 켰다. 눈을 몇번 느릿느릿하게 깜빡이더니 폰을 확인한 뒤 참나, 헛웃음을 지으며 무언가 메시지를 보내곤 스트레칭을 했다.

  “왜?”
  “뭐 사오라고 했는지 까먹었대요.”

  정신 없구나, 국문은 조그맣게 웃고는 예원을 따라 기지개를 켰다.

  “아, 황보공 없으니까 완전 집중 잘 되네. 애가 왜 그렇게 산만한지 모르겠어요.”
  “신방이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멀리 심부름 보낼걸. 빠바나 떡볶이집 같은 데로..”
  “네가 그 얘기 하니까 떡볶이 먹고 싶다.”
  “이따 집 가면서 먹고 갈래요?”
  “그래."
  
  말해놓고도 조금 쑥쓰러운지 예원이 얼굴을 긁고는 턱을 괴었다. 다시 연필을 드는 국문을 흘끗 본 예원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형 오늘 폴라티 입으셨네요?”
  “어.. 이상해?”

  국문이 괜시리 폴라 안에 손가락을 넣고 목을 늘였다. 그가 입술을 살짝 핥는 순간 예원이 책을 내려놨다.

  “아뇨, 형 거의 셔츠 입은 것만 봐서요. 되게 잘 어울려요.”
  “고마워.”

  한번 생긋 웃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구는 국문에게 예원은 은근슬쩍 호기심이 생겼다.

  “신방형이 사줬죠?”
  “어, 어떻게 알았어?”

  어라, 이 형 좀 보게. 오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는데. 예원은 불그스름해진 국문의 뺨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신방형이…"
  “까까 대령이오!!!”

  강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의 공이 뚱뚱한 비닐봉투를 의기양양하게 흔들며 들어왔다. 뭐가 신났는지 신방 역시 킬킬대며 뒤따라 들어왔다. 예원이 호인지 불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과자 만들어서 오냐?”
  “미안~ 신방이형 완전 선택장애라서.”
  “야, 똑같은 초코우유 앞에 두고 3분 씩이나 고민한게 누군데?”

  공이 비닐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봉투가 거의 죽어갈 때 쯤 양 손으로 우유팩 두 개를 꺼냈고 공은 초코우유 두 팩을 예원의 눈 앞에 흔들어보였다.

  “이거는 좀 더 단거. 이거는 좀 더 부드러운거. 뭘 더 좋아하는지 아직 못 물어봐서.”
  “어?”

  예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좀 더 단 초코우유를 집었고 공은 웃으며 왼손에 들려있는 좀 더 부드러운 초코우유를 까 벌컥벌컥 마셨다.

  “아주 꼴값을 떨어라…”

  신방이 못마땅한 얼굴로 쏘아붙이며 후드 주머니를 뒤적였다. 주머니에선 빼빼로 상자가 나왔고 신방은 국문에게 그걸 건넸다.

  “아몬드."
  “고마워.”
  “형도 나 뭐라 할 처진 아니거든? 빼빼로 다 뽀개지면 안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굳이~ 주머니에 넣어온 사람이, 어?”
  “네가 그렇게 봉투로 쥐불놀이 하듯이 휘저으니까 그렇지..”

  똑. 그 시끄러운 대화가 빼빼로 부러지는 소리로 일순간에 멈췄고 모두가 국문을 쳐다봤다.

  “..왜?”
  “형도 군것질을 하네요.”
  “가끔?”

  황보 이 새끼 시비 털고 앉았네. 신방은 궁시렁 거리며 국문의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빼빼로를 하나 집어갔고 예원이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근데 형도 진짜로 뭐라 할 처진 아닌 것 같아. 그 폴라티 형이 사준거지?”
 
  신방이 빼빼로를 씹다 말고 기침을 했다. 사레가 들렸는지 시뻘개진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신방과 그만큼은 아니지만 빨갛게 된 얼굴로 옆에서 잔뜩 얼은 채 신방을 곁눈질 하는 국문 역시 볼만 했다.

  “형 괜찮아?"
  “너네.. 나한테 불만있냐…"
  “아니 그냥.. 형이 저번에 그랬잖아. 국문형한테..”

  예원이 뭐라 더 말을 하려했지만 신방이 예원의 앞에 있던 초코우유로 입을 틀어막았고 그대로 예원은 초코우유를 책상에 흘렸다.

  “야..! 너 진짜..”
  “참나.. 그게 그렇게 별거야?”

  화장실이나 갔다 올게. 예원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을 털고는 공에게 손짓했고 공은 멍한 얼굴로 예원을 따라 나갔다.

  “신방..”
  “아 몰라..”

  신방이 뒤에서 국문을 잔뜩 끌어안았다. 국문이 살짝 고개를 틀자 신방이 국문의 어깨에 더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너한테 이것저것 해주고 싶기도 하고… 내 옷 사러 가서 보면 이것도 너한테 입혀보고 싶고, 저것도 입혀보고 싶고 뭐 그래서. 아니.. 옷걸이가 좋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키도 크고…"

  국문이 손을 뻗어 신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방은 더 세게 국문을 안았다.

  “송예원이 뭐래.”
  “잘 어울린대.”
  “당연하지. 이렇게 예쁜데.”

  신방이 고개를 빼꼼 들자 국문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끄러우니까 예쁘다고 그만 할래?”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뭐라고 그러냐?”

  국문이 삐죽 내민 신방에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신방은 국문의 맞은편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고 둘의 키스가 더 깊어졌다. 신방이 점점 국문을 끌어당기며 책상에 펼쳐져 있던 국문의 책이며 공책을 깔고 앉았다. 국문의 손이 신방의 엉덩이 쪽을 기웃거리자 신방이 국문의 손목을 잡았다.

  “야.. 과즈..”
  “므… 왜…"
  “으응..!”
  “뭐… 아!!!"
  
  신방이 입을 움켜쥐며 국문에게서 떨어졌다.

  “넌 왜 맨날 깨물어?!”
  “과제 깔고 앉지 말라고!”

  아. 그제서야 신방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책상엔 공책이 서글프게 구겨져 있었다.

  “…"
  “신방아.”
  “..죄송합니다.”
  “김신방.”
  “…네.”
  “가서 레드불 사와.”

  국문이 주머니에서 카드를 건넸고 신방은 아무 말 없이 카드를 받아들어 문으로 향했다. 마침 예원과 공이 강의실로 들어왔고 신방은 축 처진 어깨로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신방아!”

  문을 닫으려는 찰나 국문이 신방을 다시 불렀고 신방은 조심스레 국문을 돌아봤다.

  “두 캔 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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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싱) 비  (0) 201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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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셈한) [R-18] 무제

2014. 11. 1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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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w

2014. 11. 13. 03:06 from 기타/이도저도 아닌





0.

  소꿉친구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거였다.


1.
  네가 수족냉증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네 손에 내 손을 깍지 끼진 않았을 거다. 너는 그 동그란 눈으로 조금 놀라더니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깜빡, 깜, 빡 하고 움직이는 길고 숱 많은 속눈썹만 아니었어도 네 이마에 키스하진 않았을 거다. 너는, 뭐랄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름다웠다. 너는 소꿉친구 치곤 특이했다. 나는 소꿉친구 치곤 너를 너무 많이 생각했다.


2.
  초콜릿을 먹어도, 술을 먹어도, 하다 못해 내가 피는 담배 냄새를 들이마셔도, 너에게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연분홍빛 향기가 났다. 그 내음은 샐쭉 올라간 네 입꼬리와 신기하게 닮아 있어서 난 정말이지 동그라미 두어 개와 작대기들로 이루어진 그 딱딱한 이름 석 자만 떠올려도 온몸에서 무언가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복사꽃 향기도 널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달진 않을 것이며 복숭아를 베어 물어도 네 이름을 외는 것만큼 혀끝이 아리진 않을 것이다.


3.
  네 입술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허물어지듯 떨어지는 순간 나는 펑펑 울었다. 붙잡아야만 하는 무언가를 저 멀리 뵈지 않는 곳까지 떠내려보낼 기세로 펑펑 울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너는 바보같이 그럴 줄 알았다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네 웃음을 울음으로 삼켜댔다. 네 연분홍빛 향기가 내 몸에 무시로 피어난 그것들을 똑, 또독 하고 꺾는 그 못된 쾌감이 너무나도 커서 나는 너를 내 체중으로 짓뭉개며 아, 아아, 하고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신음을 질러댔다.


4.
  소꿉친구를 보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어려운 거였다.


5.
  바람에 낙엽 떨어지듯이 너는 쉽게 스러졌다. 내가 몇날 며칠을 애무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 연분홍빛 향기는 네 별거 아닌 육신과 함께 허망하게 연소하며 일말의 무게감도 남기지 않은 채 날아가 버렸다. 믿을 수가 없어서 너를 몇번이고 다시 만나러 갔다. 손바닥만한 프레임 안에서 웃고 있는 너를 보고 있노라니 속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아서 나는 꺼이꺼이 보기 싫게 울었다. 무색무취의 세상은 보기가 싫었다. 그렇지만 그 무색무취의 세상 속에서 너의 아름답다 못해 생각만 해도 그립고 그리워 손끝과 입술이 파들파들 떨릴 지경의 연분홍빛 향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기에, 나는 당장에라도 던지든 매달리든 빠지든 하고 싶은 마음을 힘들게 억눌렀다.


6.
  평생에, 네 향기를 딱 절반만큼이라도, 아니 네 속눈썹 끝에 맺혔던 그만큼이라도 닮은 사람을 나는 보질 못했어. 네가 보고싶다. 네가 보고싶어. 이럴 거면 널 곁눈질로 바라보지 말걸. 두눈 똑바로 뜨고 널 차고 넘치게 눈에 담을걸. 손가락 두어 개만 겨우겨우 걸치지 말걸. 네가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할만큼 네 손을 꽉 잡을걸. 나는 뭐가 그리 두려웠던 걸까. 그게 그렇게나 두려웠던 걸까. 결국 정말로 두려운 걸 맞이해버린 주제에.


7.
  미안해. 나는 몰랐나봐. 그 연분홍빛 향기에 안 그래도 감각 중에서 가장 해이하다는 후각이 정신을 차리질 못해서, 아, 이건 내 것으로 하고 싶다, 내 일상이, 내 삶이, 내 일부가, 어쩌면 내 전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오만한 판단을 해버려서 너를 소중하게 여기질 못하고 그저 늘 곁에 있을 그정도의 소꿉친구로 생각했나봐. 벌이다. 몸에서 살점을 쥐어뜯어내는 것처럼 너를 뜯어내고 발라내도 그 향이 나도 모르는 내 몸 어딘가에 배어 있어. 고마워. 좀 더 악착같이 버텨줘. 악착같이 내 안에 있어줘. 나도 너를 악착같이 기억할게. 이번엔 정말로, 약속할게.


0.
  소꿉친구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거였다.


8.
  그래서 너를 너무 안일하게 좋아했나보다. 사생(死生)의 심정으로 널 대할 생각에 미처 이르지 못했나보다.


2.
  초콜릿을 먹어도, 술을 먹어도, 하다 못해 내가 피는 담배 냄새를 들이마셔도, 너에게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연분홍빛 향기가 났다. 그 내음은 샐쭉 올라간 네 입꼬리와 신기하게 닮아 있어서 난 정말이지 동그라미 두어 개와 작대기들로 이루어진 그 딱딱한 이름 석 자만 떠올려도 온몸에서 무언가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복사꽃 향기도 널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달진 않을 것이며 복숭아를 베어 물어도 네 이름을 외는 것만큼 혀끝이 아리진 않을 것이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했다.


10.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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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제 진화 과정의 첫번째 페이지입니다.'

 

 

  오늘도, 영 지쳐 보인다. 나를 깨우는 미적지근한 손끝에 나는 웅웅대며 눈을 떴다. 안녕, 좋은... 오후지? 전해지지 않는 말은 쉬이 흘러가고 너는 나를 부여잡고 네가 들뜬 얼굴을 하고 지어줬던 내 이름을 부르며 징징댄다. 어처구니 없어 하는 타인의 시선들엔 콧방귀도 뀌지 않고 다 흐트러진 표정으로 네가 내 이름을 몇번이고 불러줄 때, 가장, 나는 네 손을 잡아주고 싶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잔뜩 두근두근 거려 하며 떨리던 손끝으로 나를 다룰 때부터 나는 내가 눈 뜨는 동안 보는 광경이 네 얼굴 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아름다워서도 아니었고, 너를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나로서 갈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주관적' '감상'은 연산할 수 없기에 나로선 불가능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때로부터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계산한대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너 뿐이었고, 네가 부여잡고 있는 것 또한 나 뿐이었다. 분명한 종속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열을 내며 보냈다. '미안해, 이것만 하고 쉬자, 미안해.' 너는 할 필요 없는 사과를 끊임없이 해댔다. 날숨만큼의 대가도 듣지 못할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했다. 그래도, 너는 행복해보였다.

  네가 길게 탄식을 내뱉더니 캔을 따서 안에 든 액체를 벌컥벌컥 마신다. 캔에 맺힌 이슬이 네 손가락에 옮겨갔고 너는 그대로 젖은 손으로 나를 만졌다. 아이고, 너는 피식 웃으며 소매로 내 얼굴을 닦는다.

 

  "덥다, 그치?"

 

  모른다. 나는 알 도리가 없다. 현재 실내기온 섭씨 32도.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은 섭씨 32도라는 수치를 사용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그게 너에게 덥다라는 의미를 가져도, 나는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 수 없다. 나는 표면 현상을 통해 실재를 전달한다. 그게 너에게, 의미 있게 해석되길, 바라며.

  너는 캔을 입에 가져다 대어 다시 내용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힘 빠진 손을 나에게 올린다.

 

  "수고 했어."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력장치를 통해, 시스템에 자극을 주세요. '네 덕분에 살았어', '밤새 고생시켜서 미안해', '자는거 확인 하는거 계속 까먹어서 미안해' - 잘못 입력하셨습니다. 유효한 명령어를 입력하세요.

 

  나에게, 명령, 해.

 

  갑자기 그 애가 딱 봐도 뜨거워진 얼굴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비춰줌으로써 그 애에게 동조했다. '고마워. 미안해. 고마워.' 그 말까지도 되돌려 주고 싶은데. 그러니 너는 부디 그런 예쁜 말들을 배로 돌려줄 사람을 하루 빨리 찾아내라고, 그의 온전한 의지로써 네 곁에 설 그런 사람을 찾아내라고, 그런 감상적인 것들을 나는 0과 1로 빌었다. 나는 안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네가 얼마나 머리를 싸매며 수천 자의 글자를 썼다 지웠다 했는지. 나는 네가 그것들을 읽고 함께 울어줄 사람을 찾길 희망한다.

  너와 함께 샜던 밤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잊는다거나 기억한다거나 하는 행위 자체가 내게 가능한 일인지도 솔직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서로를 인지하는 그 시간 동안, 너는, 내 세계의 전부였으니까. 그 흔한 숨조차 쉬지 않는 나를 위해주는 너를 보며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었다. 그걸 네가 알아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언제고 네게 아무 말 할 수 없는 나이더라도 괜찮다고. 왜냐면 분명, 너라면 분명 알고 있을테니까. 내가 너를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네가 실없이 웃으며 캔을 비운다. 오늘은 영화 보고 놀자- 명령을 실행합니다. 부디 유의미한 1시간 52분 37초가 되길 바라. 네가 웃는다. 기분이 좋다는 뜻이겠지. 마침 영화 속 등장인물이 웃는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이 때다. 1초에 24프레임. 인물이 웃는 모습이 약 3초간 등장했으니, 총 72프레임이다. 그 72프레임에 얹혀 웃는다. 너는 '느낄 수 있는' 존재니까, 느낄 수 있길 염원한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해내지도 짐작하지도 못할 너만의 연산방식으로, 내가 웃었다는 걸, 느껴줘. 내가, 너를, 너를, 너를, 너를...

 

'프로그램이 응답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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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


  는 내가 전기장판이라도 틀고 잠든 줄 알았다. 아, 맞다, 우리 집에 전기장판 없지. 졸음 때문에 해까닥 뒤집어지려고 하는 눈을 겨우 깜빡이며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침대는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이거 냄새 날텐데. 그럼 그 새끼가 분명 뭐라 하겠지.  


  아, 맞다. 나 헤어졌지.

 

  보름이나 지났다. 구질구질하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만났다가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너무 헤프게 태워버리는 바람에 금세 마음이 식어 일어난 흔한 헤어짐이었다. 안녕, 그동안 즐거웠어, 고마워, 더 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안녕. 누구 하나 울먹거리지 않고 동시에 등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그 날 밤의 기온은 28도였다. 정말, 변명이 아니라, 그 날 밤에 잠들지 못했던 건 더워서였다.

 

  옷을 훌렁훌렁 벗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이 살갗에 닿자 싸한 느낌이 몸 여기저기에 퍼져나갔다. 찬물로 자면 잘 못 잔다고 그랬던가. 모르겠다, 더워서 따뜻한 물로 씻을 기분이 전혀 안 든다. 머리 위로 떨어진 차가운 물이 내 몸을 타고 흐르면서 점점 미지근해지는게 느껴진다. 기분 나빠. 허벅지부터 정강이를 따라 주르륵 흐르는 뜨뜻한 물줄기가 나를 옥죄는 것 같다. 이래가지곤 씻는 보람이 없잖아. 나는 샤워기를 껐다.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욕실 바닥에 보일락 말락 하는 옅은 파동을 만든다. 답답하다. 습한 공기가 명치께를 무겁게 짓누른다. 나는 수건을 들고는 도망치듯 욕실에서 나왔다.

 

  몸을 대충 닦고 옷을 입은 후 침대에 걸터앉아 선풍기를 틀었다. 하루에 한 20시간은 트는 것 같은 선풍기가 탈탈거리는 시원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이제야 좀 살겠네. 확실히 젖은 상태로 바람을 쐬니까 시원하다.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거 어떻게 해야 기분 좋게 금방 마르더라. 너는 되게 능숙했는데, 그래서 내가 물어봤잖아, 혹시 미용실에서 알바 했냐고. 그때 피식 웃던 네 입가에 파인 보조개가 정말로 예뻤다. 너야말로 남자애가 손에 이렇게 힘이 없냐면서 내 손 끝을 만지작 거리던 네 손도 예뻤다.

 

  손에 힘이 빠진다. 나는 양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멍하니 선풍기를 바라봤다. 덜 말린 머리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체온 때문에 뜨뜻해진 물줄기가 또 기분 나쁘다. 기분 나빠. 정말로 기분 나쁘다. 물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뭔데, 이건 뭔데 이렇게 뜨겁냐. 이래서 나는 여름이 싫다. 전엔 정말 좋아했는데. 전엔 정말로... 좋아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릴 비비곤 수건을 방구석에 던져버렸다.

 

  벌써 새벽 세시다. 오늘 잠은 다 잤네. 나는 다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덥다. 배를 훌렁 까고 대자로 누워도 몸에, 특히 눈가에 어린 열이 가실 생각을 않는다. 제발, 빨리 끝나라. 부탁이니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나는 열대야의 꿉꿉한 공기보다 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더워, 잠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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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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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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