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in the end

2015. 9. 13. 02:44 from 에바

카오루 생일 축하해

근데 이런 우울한 글 써서 죄송합니다......

내용 날조 / 궁예질 주의


-------------------------------------



- 저는 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요.


- 반드시 필요한 절차야. 너를 위해서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 저를 위해서는 아닐 것 같은데요.


- ...


-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거라면..


- 아니, 그냥 네가 하고 싶은 얘길 하면 된다.


- ..그는 상당히 많은 걸 알고 있었어요. 아니, 단순히 '안다'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고 깊이 내다봤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굉장히 현학적인 말들을 하면서.. 그치만 싫지 않았어요. 그가 전달하려는 건 현학적인 게 아니었으니까.


- 어떤 점에서?


- 아이 같을 정도로 솔직했어요. 호불호라든가 시시비비라든가, 그런 직관적인 것들에 분명한 잣대가 있었으니까요. 그게 옳든 아니든 간에요.

   저랑은 영 딴판이었어요. 당신들도 알겠지만 전 대충 비위나 맞추는 사람이니까.


- 계속 얘기하렴.


- '타인을 모르면 배신할 일도, 서로를 상처입힐 일도 없지. 하지만 쓸쓸함을 잊을 수도 없어.

   인간은 영원히 쓸쓸함을 없앨 수 없어. 인간은 혼자이니까.'


- 그런 얘길 했단 말이니?


- 하지만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했어요.


- ...


- 전 그 얘길 듣고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쓸쓸함?


- 모든 걸요. 잊고 싶다고 원하는 모든 것들을.

   그러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걸 그는 알아줬어요. 알고 있었어요.


- ...


- 처음으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타인도 나도.


- 결과는 그렇지 못했구나.


- 절반은요. 그를 믿고 있던 마음을 배신당했으니까.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쓸쓸함을 잊는 게 어떤 건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다행히도 그 감정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기억하고 있어요. 복구할 순 없겠지만.


- 어째서지?


전 더 이상 그런 진보적인 감정 같은 건 다시 느낄 수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럴 힘이 없어요.

   그가 죽었으니까요.


- 요컨대 17번째 사도에게 이카리 군이 감정적으로 의존한 이유는...


- 왜 없다고 하셨어요. 듣고 싶은 얘긴 결국 따로 있는 거면서.


- 그 애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니?


- ...


- 2000년 9월 13일이다.


- ..아무렴요. 당연히 그렇겠죠.


- 그는 '인간형'일 뿐이었다. 인간의 형태를 모방한...


- 사도. 몇 번씩이나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돼요. 내가 직접 섬멸했으니까. 이 손으로.


- 일말의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


- 제가 나기사 카오루를 죽였어요.


- 그건 의미가 결핍된 결과일 뿐이다.


- 네. 남는 건 제 17사도의 섬멸을 통한 임무의 성공적인 수행이겠죠.


- 우린 필요 없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여력이 없어.


- 다음 사도는 뭘까요?


- 뭐?


- 인간의 형태를 모방한 것 다음엔 뭐가 올 것 같냐고요. 저는..

   ...저는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없어요.


- 객관성을 견지해라.


- .....


- 열일곱 번째 사도는 적으로서 마땅한 당위성을 가지고 섬멸되었다.

   넌 꼭 필요한 결단을 내린 거야.


- ..그렇네요.

   역시 제가 그를 너무 미화하는 걸까요?

   그가 남긴 좋은 기억들만 추려서 간직하려드는 걸까요?

   어쨌든 내 편이었으니까, 동기가 뭐였든 나를 이해하려 들었으니까,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를 변호하는 걸까요?

   역시 그래서는 안 되는 걸까요?


  소년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제로 된 의자가 끼익 밀렸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걸 멈췄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라더니 역시 우는 걸까, 요원은 소년을 앉히지 않았다.


  "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만큼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고요."


  소년은 울진 않았다. 대신 조금 기운이 빠진 걸음으로 문 앞에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카오루 군을 좋아했으니까."


  소년이 취조실에서 나가자 상황실의 불이 켜졌고 소령은 버튼을 누른 채 마이크에 대고 말을 했다.


  "이 시각 이후로 코드넘버 SKRNGS의 모든 기록 및 관련 데이터를 폐기합니다. 본 인터뷰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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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신) ふたりごと

2015. 6. 6. 00:27 from 에바

신지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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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니까 태어난 날이라고 해서 꼭 모든 일이 잘 풀리란 법은 없지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체육 시간에 발을 잘못 디뎌 발목을 심하게 삐는 건 좀 억울한 일이었다. 바보 신지는 하여간 제대로 넘어가는 날이 없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나를 부축하는 토우지를 재촉하는 아스카와, 언제 챙겼는지 아이스팩을 슬쩍 건네는 아야나미와, 생일 액땜이라며 손을 흔드는 켄스케를 뒤로 하고 나는 뙤약볕에서 양호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하필 양호 선생님은 1시간 정도 후에 돌아온다는 메모와 함께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토우지는 나를 침대에 앉혔다.
  “니도 참.. 날이 날인데 좀 그렇게 됐네.”
  “그러게.”
  나는 침대에 앉아 다친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런저런 이유로 양호실에 온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여기 침대에 누운 건 처음이었다.
  “뭐 별 일 있겠냐. 사내놈이 운동하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난 간다, 조금 머뭇거리는 토우지를 보며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머쓱하게 웃었다. 나만 남은 양호실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체육시간 소리만 창 밖에서 흘러들어왔다. 새삼 양호실은 엄청나게 하얘보였다. 응, 별 일 없겠지. 나는 괜히 시큰대는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도 그냥 집에 갈 생각이었다. 친구들이랑 모여서 파티를 한다거나 하는 것도 내키질 않아 그냥 집에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나에게 주는 선물인 셈 치고 읽고 싶었던 책이나 한 권 사 내 방에서 편하게 쉬면서 읽을까 했었다. 근데 발목이 이렇게 성칠 못해서야, 서점에 들리기도 뭐하겠다. 그거 살 돈은 챙겼던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수업종이 쳤다. 다음 수업은 들어가야 할텐데, 나는 풀썩 침대에 누웠다. 날씨 좋다. 잠이나 잘까. 눈을 감으니 시원하게 바람이 불었고 새삼 학교 냄새가 났다. 아픈 것만 아니면 좋네, 이래서 땡땡이를 치나보다. 나는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양호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그쪽을 보진 않았다.
  “신지 군?”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옆엔 카오루가 걱정스런 얼굴로 서있었다.
  “카오루 군? 어디 아파서 온 거야..?”
  “으응, 신지 군이 다쳤대서….”
  나는 조금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다. 학년도 다르고 생활하는 층도 다른데 카오루 군은 항상 나를 반 친구들보다도 더 세심하게 신경 써줬다. 그야, 그냥 친구 사이가 아니니 당연한 일인 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그러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나는 항상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많이 아파?”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해.”
  “아냐.”
  카오루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꼭 방금 전까지 햇살을 머금은 채 밖에서 불어온 바람처럼,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기분 좋게 그의 손가락들이 내 머리칼을 매만졌다. 나는 그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
  “피곤할텐데 누워 있어.”
  “발목만 다친 건데 뭐. 괜찮아.”
  카오루는 손을 뻗어 아주아주 조심스레 검지 끝으로 내 발목 선을 따라그렸다.
  “끝나고 깜짝 데이트 하려고 했는데.”
  “응?”
  “그냥, 조금 근사하게 밥도 먹고, 너 하고 싶은 거 있음 같이 하고, 그러고 싶어서. 학생이긴 하지만 일 년에 두어 번 정도는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물론 신지 군한텐 한 마디도 안 했지만. 카오루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며 말했다. 데이트라, 조금 낯간지러운 이야기였다. 그치만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설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신지 군.”
  나는 수없이 바라봐온 카오루의 눈과 코와 입을 조금 긴장한 채 봤다. 마침 조금 강하게 분 바람에 영화처럼 커튼이 펄럭였고 쏟아지는 새하얀 빛에 그는 정말이지 햇살로 화할 것만 같았다. 카오루의 상체가 내 쪽으로 조금 기울었고 그는 그렇게 내 턱을 가볍게 잡고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우린 처음으로 혀를 섞었다. 여태껏 느낀 적 없던 야릇한 기분이 그의 보드라운 혀와 함께 나에게 흘러들어왔고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의 교복 셔츠를 붙들었다.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난 미친듯이 뛰는 마음을 붙잡기가 어려웠다.
  “..역시 내가 조금 서둘렀지?”
  “카오루 군…"
  “그치만 갑자기 너무 기뻐서. 신지 군처럼 사랑스런 아이가 나랑 같은 땅에 태어나 같은 햇빛을 맞고 같은 숨을 마시는 게, 정말로 기적 같아서 나도 모르게….”
  카오루는 처음으로 부끄러워 했다. 입술이 타는지 혀를 살짝 내미는 모습이 창가에서 불어들어오는 청량한 바람에 섞여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실은.. 조금 더 깊어지고 싶어.”
  그치만 신지 군이 싫다면 나도 싫어, 카오루는 배시시 웃었다. 나만이 아는, 다른 데에선 짓지 않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걸로도 충분한 생일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지 군.”
  “응, 카오루 군.”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앞으로 계속 곁에 있을게. 신지 군만 좋다면 영원히 곁에 있을게. 항상, 항상.. 신지 군의 행복을 가장 깊고 크게 빌어주고 싶어. 가능하다면 이뤄주고 싶어. 그리고….”
  카오루는 숨을 잠시 참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건 듣지 않아도 알고 있는 질문에 대한 내 벅찬 대답이었다.
  “신지 군이 태어났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다른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
  나는 발목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오루의 손을 잡은 내 손이 덜덜 떨렸고 그는 가만히 웃더니 그대로 나를 품에 포옥 안았다.
  “생일 축하해, 신지 군.”
  “카오루 군.."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의 다정다감한 손길이 내 뺨부터 귀, 그리고 뒷통수를 부드럽게 쓸었다. 내 어깨를 잡은 채 카오루는 가만히 내 눈동자만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떨리진 않았지만 어떤 고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도 덩달아 안에서 뭔가가 뛰는 것 같았다. 고마워. 고마워. 그 마음들이 터질듯이 쿵쿵대 나는 카오루의 품에 더 깊게 안겼다. 네 말대로, 그것은 어쩌면 기적. 지금처럼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어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 너와 내가, 함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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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신) 나무

2015. 5. 31. 01:20 from 에바

  아가, 너는 울고 있니?”

  쏟던 눈물이 절로 멈춘 고개를 쳐들고 여기저기 둘러본 하늘엔 푸르게 피어난 나뭇잎들만이 바람 소릴 흉내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성한 잎들 사이로 손을 뻗듯 햇살이 곧게 쏟아졌고 나는 기복이 잦아든 마음으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던 나무에 완연히 기댔다. 나무껍질에서 스며나오는 청아한 내음을 맡으니 절로 숨이 곱게 나왔다. 그게 내가 그에게 처음 안긴 날이었다.

  수백 년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품어줄 정도의 나이는 됐다고 했다. 세월 사람들은 어른 아이 없이 여름이면 자신의 그늘에서 달아오른 피부를 식혔고 봄가을에는 선선히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의 이파리를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말들이 내 마음에 들렸다. 나는 음파로는 전해지지 않는 목소리가 좋아 매일 같이 그의 뿌리께에 앉아 말을 걸었다.

  그럼 요정 같은 거야? 이 나무에 사는.”

  글쎄,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 걸. 난 아주 작은 방에서 싹 틀 때부터 여기에 있었어.”

  자그마한 개미 한 마리가 발치를 지나 기어갔고 나는 기지개를 켰다.

  내 이름은 이카리 신지야.”

  예쁜 이름이구나.”

  ?”

  이전까지 불던 방향의 반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에게서 잎 두어 장을 떨어뜨렸다. 나는 떨어진 잎을 주워 만지작거렸다. 잎맥은 손금처럼 생생하게 갈라져 있었다.

  네가 지어줄래?”

  그래도 되는 거야?”

  그야 아무도 그래준 적이 없는 걸.”

  나는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무언가 조심스레 하지만 바삐 흐르는 것 같았다.

  “..카오루.”

  다시 원래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시원스레 뻗은 그의 가지들이 이리, 저리 흔들렸고 이파리 끝에 맺혀있던 이슬인지 깨끗한 방울 하나가 뺨에 토독 떨어졌다. 카오루가 그렇게까지 말해준 건 그게 처음이었다. 나는 조금 욕심이 났다. 거친 껍질과 종종 흔들릴 뿐인 가지들이 그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밤을 자고 난 뒤 나는 그에게 말했다.

  , 카오루를 만나고 싶어.”

  나는 지금 여기서 너와 만나고 있는 .”

  아냐, 내가 원하는 그런 아니란 말야.”

  그럼?”

  진짜 너를 만나고 싶어. 나무가 아니라.. 나랑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카오루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모든 이야기들이 착각이었나 싶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몸을 짚었다.

  신지.

  .”

  나는 신지사랑해.”

  ?”

  신지나를 처음으로.. ‘해줬으니까. 내게.. 이름을 붙여줬으니까.”

  나는 카오루의 우툴두툴한 피부에 뺨을 갖다댔다. 결국 나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셈이었다.

  내가 너를 안으려면 나는 나무를 떠나야 ."

  그럼 넌 죽는 거야?”

  그의 가장 넓게 뻗은 가지가 흔들렸다. 나는 연인의 손을 잡듯 그의 껍질을 손끝으로 훑었다.

  내가 나무를 떠나길 원하니?”

  카오루….”

  신지, 나는 너의 마음을 묻고 있는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카오루에게 이마를 맞댔다. 잎새 사이로 바람이 휘어지는 익숙한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크게 들렸다. 그는 내 속을 쉽게 읽었다. 나는 별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에 그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도끼를 챙겨 갔다. 카오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지를 몇 번 흔들 뿐이었다.

  할게.”

  , 신지.”

  나는 도끼를 든 팔을 최대한 크게 휘둘러 그의 밑둥을 내리찍었다. , 하고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고 어설픈 도끼질을 몇 차례 더 하자 점점 그의 살구빛 살점이 뜯겨나왔다.

  아아..!”

  쇳날이 그의 안쪽을 찍자 나 모르게 참고 있던 그의 고통스런 신음이 순식간에 터져나와 내 마음 속을 번잡하게 헤집었다. 처음 듣는 음색에 나는 감히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그대로 도끼를 떨어뜨렸다.

  카오루!!”

  신지, 멈추지 말고 계속 해.”

  그치만, 그치만….”

  신지가 원하는 일이라면 나는 괜찮아.”

  네가 괴로워하는 건 원치 않아!”

  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주위는 그를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적막에 잠겼고 그렇게나 흔히 불던 바람도 흔적 하나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카오루에게 닿으려 했지만 그의 말이 나를 멈췄다.

  그럼 괴로워 하지 않을게.”

  뭐야 그게, 나는 울음을 조금 참으며 반문하려 했지만 카오루의 모습은 어쩐지 그 모든 걸 튕겨내는 것 같아 다시 도끼를 집어들었다. 연이은 도끼질은 다른 나무들을 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다. 도끼자루를 쥔 손이 새빨갛게 부을 때까지 네가 사는 나무를 내리찍자 우지끈 소리와 함께 나무가 넘어갔다. 점점 빠르게 고꾸라지는 나무에선 허여멀건한 몸뚱아리 하나가 빠져나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잡으려 양팔을 벌렸다. 카오루의 뭉개질 것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육체는 나에게 쓰러지며 안겼다. 햇빛을 빛나 시리게 반짝이던 잎새들처럼 그의 머리칼은 하얗게 빛났다. 눈대중으로 보기에 나보다 되려 조금 더 큰 것 같은 그의 몸엔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그는 내 가슴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지. 그렇게 입을 벙긋거린 카오루의 눈은 새빨간 색이었다. 그 잘 뻗은 가지에 열매가 맺혔다면 이 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카오루는 갓 태어난 사족보행 동물처럼 비틀대다 제자리에 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게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안긴 날이었다. 그는 요정도 뭣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내가 베어낸 한 그루의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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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 나기사 군. 그건 좀 곤란해."

  "왜?"

  "그, 왜냐니... 남자잖아? 우리 둘 다.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당연이라. 당연. 당연. 당연. 마땅한 것. 생이 있는 것들이 절로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것. 그래, 그런 것이라.

  "아, 나기사 군, 그게..."

  "..."

  "미안해."

  미안해? 뭐가? 나를 보기좋게 찬 게? 당연하다고 아무 생각없이 발음해 뱉어버린 게? 미안, 미안하대. 미안이랜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고는 그대로 신지를 두고 방에서 나와 방향감각도 없이 발끝이 닿는 대로 걸어댔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이 네가 나를 사랑할 거라곤 쉽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치만 난 네가 최소한 시도는 해볼 줄 알았는데. 나를 사랑하려는 시도까진 아니어도 좋았어, 그냥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어도 좋았을텐데. 그걸로도 난 살만하다고 느꼈을 거다. 충분히 살만하다고 자위하면서 유리덮개 안에서 곱게 고개를 떨군 꽃 같은 너를 보고 보고 또 보다가 참을 수가 없어질 때 겨우 향기나 한번 맡았을 거야. 어쩌면 꽃잎을 엄지랑 검지로 만지작거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도 난 너를 꺾지는 않았을텐데. 그 똑 하고 꺾이는 소리는 호수에 물 튀듯 맑고 깨끗하겠지만 그럼에도 난 널 꺾진 않았을텐데.

  그런데 넌 왜 나를 꺾었을까.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신지 군. 나는 내 방에 들어오면서 주술이라도 걸듯 중얼거리다 침대에 털썩 걸터 앉았다. 신지 군. 그렇게나 곤란한 척을 하던 신지 군. 사실은 불쾌했잖아. 결국 불쾌했던 거잖아. 눈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눈물이 흘러 손으로 닦는게 무색할 정도로 나는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왜 미안하다고 했어? 내가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말랬잖아. 신지 군은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거기 그래 그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어떤 일을 저질러도 적어도 나에겐 괜찮다고 했잖아. 신지 군. 신지. 왜. 왜 그랬어. 나는 주먹을 쥐고 벽을 마구 내리쳤다. 이렇게 하면 들릴까? 무슨 일인가 놀라서 내 방으로 찾아올까? 그럴리가. 넌 그럴 깜냥이 안 될 거야. 나는 더욱 세게 벽을 내리쳤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그러고 싶어도 이제 닦지 않는 눈물이 줄줄 흘러서 목이고 마음이고 싹 막혀 꺽꺽 듣기 싫은 쇳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나는 미웠다. 나는 신지가 너무 미워. 그렇게나 바라봤는데, 그렇게나 애타게 바랐는데. 너는 왜 날 항상 밀어내는 거야? 왜 날 여기까지 밀어버린 거야? 네가 걸을 길을 뒷걸음질 쳐가며 마련했는데 결국 내가 디딜 곳마저 없는 곳으로 넌 왜 걸어온 거야? 넌 내 눈을 보며 애매한 미소였지만 어쨌든 웃으며 나를 따라왔잖아. 너는 내가 추락하는 게 보고싶었던 걸까. 신지 군. 끝이 있을지나 모르겠는 곳으로 날 밀쳐내는 와중에도 아름다웠던 네 미안하단 목소리. 아름다웠던 네 눈동자. 나는 벽을 치던 손을 멈췄다.

  "신지 군.."

  보고 싶어. 이젠 더 이상 자신 있게 널 마주하기 어렵겠지. 난 괜찮아도, 넌 보나마나 지금도 죄책감에 싸여 병실 침대 같은 그곳에서 몸을 비틀고 있을 거야. 신지 군은 너무나도 착한 아이니까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몰라. 울고 있는 네 모습을 떠올리면 견딜 수가 없다. 새하얀 시트보다 더 하얗게 질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꺼이꺼이 우는 네 모습은 슬픈만큼 사랑스러워서 나는 항상 너를 달래면서도 조금 짓궂은 생각을 했다. 네가 너를 꼬옥 안아준 건 네가 얼른 마음을 추스리고 울음을 그치길 원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 품 안에서 둥지로부터 떨어진 새처럼 파르르 떠는 네 뜨거운 몸의 진동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인데도 너는 매번 안을 때마다 내 품과 맘에 꼭 차게 들어왔다. 네가 너와 나 사이에 틈을 안 주길래,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치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벽에 머리를 쿵, 쿵 박았다. 아, 나는 이제 살 이유가 없다. 너와 함께하지 못하는 삶이라는 건 그야말로 무가치하다. 나는 머릿속에 어절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를 찧었다. 목까지 찌르르 충격이 내려왔지만 기계적으로 계속 머리를 박았다. 나는 지금 뭘 하는 거야? 왜 이러는 거야? 왜? 뭐 때문에? 누구 때문이더라?

  아, 맞다. 네가 나를 찼지. 새까맣게 타들어가 바닥에 눌러붙은 미련을 긁어내며 나는 생각했다. 죽여버릴 거야. 응, 역시 그게 좋겠지. 아무래도 내가 갖지 못한 신지 군을 그대로 방치해둘 순 없어. 신지 군을 죽이고 싶다. 나를 바라보던 그 모호한 눈빛도, 나를 이리도 휘저어 놓은 내 속의 너도 죽여버리고 싶다. 너를 떠올리면 그렇게 아프고 아렸던 마음도, 너에게 들려주고파 속으로 외던 멜로디도, 어쩌다 가끔 나를 향해 정말 행복한 얼굴로 웃던 네 예쁜 눈코입도 전부 다 찢고 짓이길 거다. 싸그리 잊을 거야. 지금부터 널 싸그리 잊을 거야, 신지 군. 너를 봐도 조금도 설레지 않게, 너를 생각해도 더 이상 울지 않게 너를 없애버릴 거야.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소용 없어. 그 예쁜 얼굴을 잔뜩 우그러뜨리며 빌고 기어도 손 쓸 수 없도록 너를 지울 거야. 그니까. 그러니까.

  나를 꼭 돌아봐줘. 나를, 나만을 향해서 웃든 울든 화내든 한 번만 네 표정을 보여줘. 그건 정말로 아름다울 거야. 기십 번을 죽어도 잊을 수 없을만큼 깊고 아프게 새겨질 거야. 무슨 얼굴을 해도 예쁠, 예쁜, 나의 신지 군. 그치만 넌 역시 행복해야해. 넌 역시 행복해야해. 신지 군은 웃는 게 정말로 사랑스러우니까. 너무나도 사랑스러우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앞으로도 셀 수 없이 화를 냈다 슬퍼했다 증오했다 외로워했다 절망했다 네 행복을 빌게 되어도 너는 변함 없이 사랑스럽겠지. 내가 변해도 너는 미치도록 사랑스러울 거야. 신지 군. 내가 사랑하는 신지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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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

카오신) 성년의 날

2015. 5. 18. 23:19 from 에바

  해가 지고 나서도 여전히 왁자지껄한 캠퍼스가 낯설다. 성년의 날. 그 전까지만 해도 이게 중요한 날인지 어떤지 전혀 감이 안 왔을 정도로 생경한 날이었지만 묘하게 들뜬 분위기에 모두가 흔쾌히 마음을 맡기곤 이런저런 것들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즐겼다. 내 가방에도 과 학생회에서 나눠준 장미 한 송이와 이런저런 군것질거리가 들어있었지만 나는 그닥 기쁘거나 하진 않았다.

  “신지 군!”
  그게, 영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로써 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데이의 중간 쯤 되는 것 같은 무게감이 나에겐 와닿지 않았다. 일률적인 것에 순응하는 건 쉬웠지만 그게 나를 바꾼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성년, 어른, 하는 것들은 조금 애매해서 나는 받아든 꽃마저도 별로 예뻐 보이지 않았다.
  “신지 군.”
  나는 내 팔이 붙들리고 나서야 인기척을 느끼고 이어폰을 뺐다. 나를 붙잡은 그 하얀 손은 어정쩡하게 이어폰을 들고 있는 내 손을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감싸쥐었다.
  “아, 미안해, 카오루 군. 잘 못 들었어..”
  “괜찮아.”
  “근데, 이건...?”
  날이 날이라, 카오루는 빙그레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 걸음을 맞췄다.
  “학교에서도 줬지?”
  나는 끄덕였고 그는 나를 더 자세하게 보려는 듯 조금 더 고개를 틀었다가, 입을 한번 삐죽하고, 다시 정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동기들하고 약속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연락 안 했는데, 아까 우연히 아스카랑 만나서 물어봤더니 아니라고 하길래.”
  “그냥.. 좀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술 먹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니까.”
  “맞다, 신지 군은 술자리 별로 안 좋아했지.”
  평소 작별 인사를 나누던 횡단보도에 멈춰섰지만 카오루는 방향을 틀지 않고 그대로 내 옆에 섰다. 학교 근처에 있는 내 자취방까지 그와 같이 가는 일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이걸 ‘바래다준다’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나는 쉽게 얼굴이 뜨거워지곤 했다. 더군다나 오늘 같이, 꽃이라도 선물 받은 날은. 나는 미처 말하지 못한 비밀이라도 있는 꼬마애처럼 발끝을 비비적거렸다. 곧 초록불이 켜졌고 우리는 횡단보도를 서서히 건넜다.
  “조금 우스운 얘기긴 한데.”
  “응?"
  “성년이 된 기분, 어때?”
  나는 깜빡깜빡 점멸하는 초록불의 잔상을 느끼며 묵묵히 걸었다. 그도 함께 묵묵히 걸어줬다. 우습다기보단, 역시 조금 애매한 이야기다.
  “실은.. 잘 모르겠어. 성년이라든가 어른이라든가. 성년의 날이 됐다고 뭐가 달라진 걸지.. 그냥 말 뿐인 거잖아, 사실은."
  “그런가.”
  평소답지 않게도 카오루는 나의 푸념에 얼추 수긍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너라도 아닌 건 아닌 거겠지. 나는 장미를 감싼 비닐을 괜시리 부스럭부스럭 만졌다.
  “카오루 군은 어땠어? 작년 성년의 날 때.. 축하도 많이 받고 그랬을 거 아냐.”
  “나도 크게 다를 건 없었어. 올해처럼 작년에도, 아니 작년처럼 올해도 학생회 애들이 이런저런 선물을 나눠줬고, ‘안녕’, ‘밥 먹었어?’, 같은 인사 대신에 축하한다는 얘길 했고. 그 땐 그냥 때가 돼서 어른이라 한다고 생각했지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변한게 있었다고 생각해. 그게, 짧다고 한다면 짧을 수도 있지만, 꽤나 여러 날을 살고 맞은 성년이잖아. 그 지난 날들이 당장 성년의 날에는 아니더라도 나를 여기까지 오게끔 한 것 같달까. 이렇게 변하게끔 했달까.”
  카오루는 조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는 어느새 도착한 자취방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처음엔 그게 싫었어. 변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나도 모르는 의미로 내가 변하는 게 불쾌했어. 그치만..”
  나는 숨을 조금 삼켰다. 카오루가 자신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건 묘한 느낌이었다.
  “변한다는 건 불가피한 일이기 전에 해볼만한 일 같아. 그게.. 결국은 나의 지난 날들을 모아 또 다른 나를 탄생시키는 거니까. 신지 군도 마찬가지일 거야.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날들을 생각한다면 신지 군에게도 오늘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카오루는 내 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시선을, 돌릴까. 나는 처음으로 그의 눈을 바로 봤다.
  “이렇게 변한 신지 군이 아름다워.”
  카오루는 내 귓바퀴를 엄지로 조심스레 쓸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흠뻑 들이마셨다.
  “카, 카오루 군..”
  “향긋해. 장미나 향수 같은 건 다 일시적인 냄새일 뿐이야. 그치만 신지 군의 냄새는 신지 군 자신에게서 나오는, 지난 열아홉 해 동안 성장해온 내음이야.”
  성장, 한 건가. 그 붉은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만약 내가 정말로, 정말로 성장했다면, 앞으로도 성장한다면, 그건 아마 네가 곁에 있기 때문일 거다. 네가 그 눈으로 나를 봐주기 때문에, 네 두 눈에 내가 있기 때문에.
  “신지 군을 사랑해.”
  나는 카오루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라가는 입술을 앙 물었다. 카오루는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오늘, 안 받았지?”
  “응?”
  나는 내 허리를 감싸쥔 카오루의 손에 이끌려 그의 품에 안겨들어갔고 그는 나에게 그대로 입을 맞췄다. 오늘 내내 캠퍼스를 수놓던 붉은 빛 향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내 입 안에 가득 퍼졌고 나는 그의 옷소매를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벌써 밤이 더워지는 때가 왔나 봐, 나의 성년의 밤은 조금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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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

  여드레, 또 비가 내린다. 비가 창문이고 나무고 도로고 가리지 않고 흠뻑 적실 동안 너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그게, 지금 창 밖으로 보이는 온 세상보다 훨씬 젖어있던 네 두 눈이 자꾸 마음 한 켠에 데굴데굴 굴러다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렇게까지 시간을 흘려버릴 줄 알았으면 미안하다고 빨리 말할 걸. 나는 매일 밤을, 아니 아주 조금 과장을 보태 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 종일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너 때문에, 아니 나 때문에.

  흔한 연인들의 다툼처럼 사소한 일이 원인이었다. 누구 하나가 살짝만 굽혀서 미안해, 그 발음도 쉬운 세 글자를 말했다면 끝났을 일이었다. 아, 나는 왜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가지고. 조금 인상을 쓰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길 느릿느릿 꺼내자 네 숨결이 조금씩 떨려왔더랬다. 그 때 멈췄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너를 안쓰럽다 생각하면서도 기어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고 결국 네 눈에서 투명한 뭔가가 흐르는 걸 보고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중인지를 알게 됐다. 미안. 그제서야 소리로써 나온 그 말은 내가 아닌 네 입에서 튀어나왔고 나는 그대로 가버리는 네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질 때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돌아갔다. 그 날은 그렇게 보냈다. 그 다음 날과 그 다음 날은 조금 화가 났다. 화난 티도 내지 않는 네가 답답했다. 그 다음 날부터 꽁한 마음이 조금씩 풀리더니 5일 째 되는 날엔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울먹일 정도로 너에게 미안했다. 6일 째엔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젠 네가 예전에 보내줬던 네 시간표를 찾아내 너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여드레, 오늘도 그 때처럼 비가 내렸고 나는 우산 두 개를 챙겨 하나는 쓰고 하나는 가방에 넣고 네 수업이 끝나기를 수업 종료 30분 전부터 기다렸다. 괜히 문에 귀를 갖다대보기도 하고 인상을 팍팍 쓰며 문 틈새를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싸늘하게 젖은 네 눈만 생각나서 나는 한숨을 폭폭 쉬곤 벽에 기댔다. 잠을 통 못 자서 그런지 서서 졸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하여간 널 기다리다 별 쇼를 다 한 것 같다. 그 중에 가장 어처구니 없는 건, 그렇게 혼자 흔들, 흔들거리다 강의실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에 섞인 널 놓쳤다는 거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눈으로 네 뒷통수를 찾아헤맸다. 겨우 발견한 익숙한 뒷모습은 시끄러운 주위를 한껏 무시하려 애쓰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나는 허겁지겁 네 뒤를 따라갔다.
  스토커도 아니고 말야, 나는 네 당당한 연인인데 그렇게 부르고 부르던 네 이름도 못 부르고 네가 걸어간 그 자욱 그대로를 밟았다. 너는 걷는 것도 예쁘네. 살짝 발끝을 모으며 안짱걸음을 걷는 네 다 닳은 운동화 뒤축을 보니 돌아오는 생일엔 커플 운동화를 선물해 볼까 싶었다. 튀는 건 싫어하니까,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게 좋겠지. 아차, 나는 조금 느려진 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너와의 거리를 적당히 좁혔다. 항상 함께 걸을 때면 손을 잡고 걷더라도 네 쪽이 한 발자국 반 정도 뒤쪽에서 걸었었다. 그때 내 옆-뒷모습을 보던 네 기분은 어땠으려나. 너는 내 걸음걸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을까.
  그때 네가 뒤를 돌았다. 나는 깜짝 놀라, 왜 그랬을까, 입을 가리곤 벽 뒤에 숨었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올랐다. 들고 있던 우산은 이미 엉망으로 방향이 뒤틀려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고대로 맞았다. 뭐야, 왜,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사람이 살다가 싸울 수도 있고 화낼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는 건데, 나는 그게 너라고 하면 당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 눈을 질끈 감고 발을 동동 굴렀다.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네가 울지 않았으면, 네가 행복했으면. 나로 인해. 그렇게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 채 저어기서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있는 네 얼굴이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른다. 저기 있잖아, 잡을 수 있잖아. 나는 기울어진 우산을 바로 쓰고 다시 길가로 나왔다. 조금씩 잦아드는 빗속에서 나와의 거리를 벌려가는 네 뒷모습이 나를 부르는 것 같다. 가자, 지난 여덟날 동안 네가 나랑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당장 잡아야겠다.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일단 네 맑은 두 눈을 보면서 미안하다고 또박또박 말해야지. 그리곤 네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말할 거야. 정말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에서 뭔가가 자꾸자꾸 밀고 올라와 내 눈으로 흘러넘칠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내가,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안 될 거야. 나는 점차 개어가며 모습을 드러내는 하늘이 비쳐 구름빛을 띠는 길바닥을 찰박찰박 뛰었다.

  “신지 군!!!”

  내 목소리에 네가 뒤를 돈다. 조금 놀란 것 같더니, 뭐야, 웃잖아. 역시 너도 그랬나보네. 우산 그냥 하나만 챙겨도 됐을 걸. 나는 네 손을 덥썩 잡았다. 빗기운에 차가운 네 손을 그 자리에서 녹일 기세로 꼭 쥐었다.

  "신지 군, 정말..."
  "고마워, 카오루 군."

  네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너는 몰랐겠지만 조금 운 것 같다. 비는 여드레 동안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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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카오신) 짧뻘

2015. 1. 2. 04:49 from 에바

매우 짧은데다가 의식의 흐름

세계관 개무시

캐붕주의

원작 몰이해 주의

널 지우려 해 들으면서 씀

-------------------------


  너만은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나의 말을 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애매한 미소로 웃어넘겼더랬다. 좋아한다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되려 너는 고심했다. 너는 이것저것 궁금해했지만 목적을 묻진 않았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을거라고,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너를 잊는 것은 일면 합리적일진 모르나, 내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님에는 분명했다. 그래서 다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조금이라도 흐려질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나는 몇번이고 네 연약한 미소를 상기하며 영겁의 시간을 보냈다. 그럴수록 너는 희미해져갔다. 가끔씩 잡던 네 손은 답지 않게 차가웠다. 그렇지만 가장 차가웠던 것은 그때 마지막으로 나를 움켜쥔 대리자의 손이었다. 그치만 네 눈시울은 뜨거웠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안녕, 나는 - 몇번째였더라 - 너와 잠정적으로 이별했다.


  무시로 밝은 지구의 위성을 등지고 너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는 것은 이미 나에겐 목표가 아닌 과정의 일부였다. 어쩐지 더 수척해보이는 너는 또다시 타인이 보낸 비를 맞고 있었다. 이번엔, 이번엔 완벽하게.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 너를 보며 나는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또 억지를 부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이랄 것도 없이, 모든 것이 소멸한 원점의 방에서 네 보잘 것 없는 육신이 숙명에 제 남은 의미를 맡길 때 나는 또 다시 찾아온 실패 속에서 '다음에는'이라는 무책임한 네 글자를 힘겹게 씹어삼켰다. 하지만 언젠간 끝을 내야겠지. 내가 다시 찾아오지 않아도 될 상황이 되어야만 네가 진정으로 웃을 수 있을테니까. 그 때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하노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하늘에 흩뿌려진 수많은 별 중 하나가 아닌 자신만의 빛과 궤도로 존재하는 별을, 들판에 한가득 핀 수많은 꽃 중 하나가 아닌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로 살랑이는 꽃을 닮은 너에게, 나는 온당한 상대로서 남을 수 있을까.


  너를 처음 만났던 곳. 희망과 절망이 보기좋게 엉켜있던 그 땅에서 너를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고 싶었다. 과한 욕심으로 끝끝내 너와 함께 했지만 이건 아니란 걸 깨닫기엔 배드 엔딩이 조금 더 발이 빨랐다. 한도 없이 되돌아걸으면 너를 또 만날 수 있겠지. 얼마나 더 가야할지 알 수 없어도 좋다.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어, 신지군. 신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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