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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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태어난 날이라고 해서 꼭 모든 일이 잘 풀리란 법은 없지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체육 시간에 발을 잘못 디뎌 발목을 심하게 삐는 건 좀 억울한 일이었다. 바보 신지는 하여간 제대로 넘어가는 날이 없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나를 부축하는 토우지를 재촉하는 아스카와, 언제 챙겼는지 아이스팩을 슬쩍 건네는 아야나미와, 생일 액땜이라며 손을 흔드는 켄스케를 뒤로 하고 나는 뙤약볕에서 양호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하필 양호 선생님은 1시간 정도 후에 돌아온다는 메모와 함께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토우지는 나를 침대에 앉혔다.
“니도 참.. 날이 날인데 좀 그렇게 됐네.”
“그러게.”
나는 침대에 앉아 다친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런저런 이유로 양호실에 온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여기 침대에 누운 건 처음이었다.
“뭐 별 일 있겠냐. 사내놈이 운동하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난 간다, 조금 머뭇거리는 토우지를 보며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머쓱하게 웃었다. 나만 남은 양호실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체육시간 소리만 창 밖에서 흘러들어왔다. 새삼 양호실은 엄청나게 하얘보였다. 응, 별 일 없겠지. 나는 괜히 시큰대는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도 그냥 집에 갈 생각이었다. 친구들이랑 모여서 파티를 한다거나 하는 것도 내키질 않아 그냥 집에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나에게 주는 선물인 셈 치고 읽고 싶었던 책이나 한 권 사 내 방에서 편하게 쉬면서 읽을까 했었다. 근데 발목이 이렇게 성칠 못해서야, 서점에 들리기도 뭐하겠다. 그거 살 돈은 챙겼던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수업종이 쳤다. 다음 수업은 들어가야 할텐데, 나는 풀썩 침대에 누웠다. 날씨 좋다. 잠이나 잘까. 눈을 감으니 시원하게 바람이 불었고 새삼 학교 냄새가 났다. 아픈 것만 아니면 좋네, 이래서 땡땡이를 치나보다. 나는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양호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그쪽을 보진 않았다.
“신지 군?”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옆엔 카오루가 걱정스런 얼굴로 서있었다.
“카오루 군? 어디 아파서 온 거야..?”
“으응, 신지 군이 다쳤대서….”
나는 조금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다. 학년도 다르고 생활하는 층도 다른데 카오루 군은 항상 나를 반 친구들보다도 더 세심하게 신경 써줬다. 그야, 그냥 친구 사이가 아니니 당연한 일인 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그러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나는 항상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많이 아파?”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해.”
“아냐.”
카오루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꼭 방금 전까지 햇살을 머금은 채 밖에서 불어온 바람처럼,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기분 좋게 그의 손가락들이 내 머리칼을 매만졌다. 나는 그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
“피곤할텐데 누워 있어.”
“발목만 다친 건데 뭐. 괜찮아.”
카오루는 손을 뻗어 아주아주 조심스레 검지 끝으로 내 발목 선을 따라그렸다.
“끝나고 깜짝 데이트 하려고 했는데.”
“응?”
“그냥, 조금 근사하게 밥도 먹고, 너 하고 싶은 거 있음 같이 하고, 그러고 싶어서. 학생이긴 하지만 일 년에 두어 번 정도는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물론 신지 군한텐 한 마디도 안 했지만. 카오루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며 말했다. 데이트라, 조금 낯간지러운 이야기였다. 그치만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설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신지 군.”
나는 수없이 바라봐온 카오루의 눈과 코와 입을 조금 긴장한 채 봤다. 마침 조금 강하게 분 바람에 영화처럼 커튼이 펄럭였고 쏟아지는 새하얀 빛에 그는 정말이지 햇살로 화할 것만 같았다. 카오루의 상체가 내 쪽으로 조금 기울었고 그는 그렇게 내 턱을 가볍게 잡고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우린 처음으로 혀를 섞었다. 여태껏 느낀 적 없던 야릇한 기분이 그의 보드라운 혀와 함께 나에게 흘러들어왔고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의 교복 셔츠를 붙들었다.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난 미친듯이 뛰는 마음을 붙잡기가 어려웠다.
“..역시 내가 조금 서둘렀지?”
“카오루 군…"
“그치만 갑자기 너무 기뻐서. 신지 군처럼 사랑스런 아이가 나랑 같은 땅에 태어나 같은 햇빛을 맞고 같은 숨을 마시는 게, 정말로 기적 같아서 나도 모르게….”
카오루는 처음으로 부끄러워 했다. 입술이 타는지 혀를 살짝 내미는 모습이 창가에서 불어들어오는 청량한 바람에 섞여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실은.. 조금 더 깊어지고 싶어.”
그치만 신지 군이 싫다면 나도 싫어, 카오루는 배시시 웃었다. 나만이 아는, 다른 데에선 짓지 않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걸로도 충분한 생일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지 군.”
“응, 카오루 군.”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앞으로 계속 곁에 있을게. 신지 군만 좋다면 영원히 곁에 있을게. 항상, 항상.. 신지 군의 행복을 가장 깊고 크게 빌어주고 싶어. 가능하다면 이뤄주고 싶어. 그리고….”
카오루는 숨을 잠시 참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건 듣지 않아도 알고 있는 질문에 대한 내 벅찬 대답이었다.
“신지 군이 태어났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다른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
나는 발목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오루의 손을 잡은 내 손이 덜덜 떨렸고 그는 가만히 웃더니 그대로 나를 품에 포옥 안았다.
“생일 축하해, 신지 군.”
“카오루 군.."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의 다정다감한 손길이 내 뺨부터 귀, 그리고 뒷통수를 부드럽게 쓸었다. 내 어깨를 잡은 채 카오루는 가만히 내 눈동자만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떨리진 않았지만 어떤 고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도 덩달아 안에서 뭔가가 뛰는 것 같았다. 고마워. 고마워. 그 마음들이 터질듯이 쿵쿵대 나는 카오루의 품에 더 깊게 안겼다. 네 말대로, 그것은 어쩌면 기적. 지금처럼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어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 너와 내가, 함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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