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너는 왜 울고 있니?”
쏟던 눈물이 절로 멈춘 고개를 쳐들고 여기저기 둘러본 하늘엔 푸르게 피어난 나뭇잎들만이 바람 소릴 흉내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성한 잎들 사이로 손을 뻗듯 햇살이 곧게 쏟아졌고 나는 기복이 잦아든 마음으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던 나무에 완연히 기댔다. 나무껍질에서 스며나오는 청아한 내음을 맡으니 절로 숨이 곱게 나왔다. 그게 내가 그에게 처음 안긴 날이었다.
수백 년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다 품어줄 정도의 나이는 됐다고 했다. 그 긴 세월 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여름이면 자신의 그늘에서 달아오른 피부를 식혔고 봄가을에는 선선히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의 이파리를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말들이 내 마음에 들렸다. 나는 음파로는 전해지지 않는 목소리가 좋아 매일 같이 그의 뿌리께에 앉아 말을 걸었다.
“그럼 요정 같은 거야? 이 나무에 사는.”
“글쎄,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 걸. 난 아주 작은 방에서 싹 틀 때부터 여기에 있었어.”
자그마한 개미 한 마리가 발치를 지나 기어갔고 나는 기지개를 켰다.
“내 이름은 이카리 신지야.”
“예쁜 이름이구나.”
“넌?”
이전까지 불던 방향의 반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에게서 잎 두어 장을 떨어뜨렸다. 나는 떨어진 잎을 주워 만지작거렸다. 잎맥은 손금처럼 생생하게 갈라져 있었다.
“네가 지어줄래?”
“그래도 되는 거야?”
“그야 아무도 그래준 적이 없는 걸.”
나는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무언가 조심스레 하지만 바삐 흐르는 것 같았다.
“..카오루.”
다시 원래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시원스레 뻗은 그의 가지들이 이리, 저리 흔들렸고 이파리 끝에 맺혀있던 이슬인지 깨끗한 방울 하나가 뺨에 토독 떨어졌다. 카오루가 그렇게까지 말해준 건 그게 처음이었다. 나는 조금 욕심이 났다. 거친 껍질과 종종 흔들릴 뿐인 가지들이 그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밤을 자고 난 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 카오루를 만나고 싶어.”
“나는 지금 여기서 너와 만나고 있는 걸.”
“아냐,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란 말야.”
“그럼?”
“진짜 너를 만나고 싶어. 나무가 아니라.. 나랑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카오루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모든 이야기들이 착각이었나 싶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몸을 짚었다.
“신지.”
“응.”
“나는 신지를 사랑해.”
“왜?”
“신지는 나를 처음으로.. ‘상대’해줬으니까. 내게.. 이름을 붙여줬으니까.”
나는 카오루의 우툴두툴한 피부에 뺨을 갖다댔다. 결국 나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셈이었다.
“내가 너를 안으려면 나는 이 나무를 떠나야 해."
“그럼 넌 죽는 거야?”
그의 가장 넓게 뻗은 가지가 흔들렸다. 나는 연인의 손을 잡듯 그의 껍질을 손끝으로 훑었다.
“내가 이 나무를 떠나길 원하니?”
“카오루….”
“신지, 나는 너의 마음을 묻고 있는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카오루에게 이마를 맞댔다. 잎새 사이로 바람이 휘어지는 익숙한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크게 들렸다. 그는 내 속을 쉽게 읽었다. 나는 별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에 그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도끼를 챙겨 갔다. 카오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지를 몇 번 흔들 뿐이었다.
“할게.”
“응, 신지.”
나는 도끼를 든 팔을 최대한 크게 휘둘러 그의 밑둥을 내리찍었다. 콱, 하고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고 어설픈 도끼질을 몇 차례 더 하자 점점 그의 살구빛 살점이 뜯겨나왔다.
“아아..!”
쇳날이 그의 안쪽을 찍자 나 모르게 참고 있던 그의 고통스런 신음이 순식간에 터져나와 내 마음 속을 번잡하게 헤집었다. 처음 듣는 음색에 나는 감히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그대로 도끼를 떨어뜨렸다.
“카오루!!”
“신지, 멈추지 말고 계속 해.”
“그치만, 그치만….”
“신지가 원하는 일이라면 나는 괜찮아.”
“네가 괴로워하는 건 원치 않아!”
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주위는 그를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적막에 잠겼고 그렇게나 흔히 불던 바람도 흔적 하나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카오루에게 닿으려 했지만 그의 말이 나를 멈췄다.
“그럼 괴로워 하지 않을게.”
뭐야 그게, 나는 울음을 조금 참으며 반문하려 했지만 카오루의 모습은 어쩐지 그 모든 걸 튕겨내는 것 같아 다시 도끼를 집어들었다. 연이은 도끼질은 다른 나무들을 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다. 도끼자루를 쥔 손이 새빨갛게 부을 때까지 네가 사는 나무를 내리찍자 우지끈 소리와 함께 나무가 넘어갔다. 점점 빠르게 고꾸라지는 나무에선 허여멀건한 몸뚱아리 하나가 빠져나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잡으려 양팔을 벌렸다. 카오루의 뭉개질 것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육체는 나에게 쓰러지며 안겼다. 햇빛을 빛나 눈 시리게 반짝이던 잎새들처럼 그의 머리칼은 하얗게 빛났다. 눈대중으로 보기에 나보다 되려 조금 더 큰 것 같은 그의 몸엔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그는 내 가슴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지. 그렇게 입을 벙긋거린 카오루의 눈은 새빨간 색이었다. 그 잘 뻗은 가지에 열매가 맺혔다면 이 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카오루는 갓 태어난 사족보행 동물처럼 비틀대다 제자리에 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게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안긴 날이었다. 그는 요정도 뭣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내가 베어낸 한 그루의 나무였다.
'에바' 카테고리의 다른 글
love in the end (0) | 2015.09.13 |
---|---|
카오신) ふたりごと (0) | 2015.06.06 |
카오신) 카오루가 차여서 멘붕하는 쪽글 (0) | 2015.05.26 |
카오신) 성년의 날 (0) | 2015.05.18 |
에바/카오신) 8일 째, 비가 그치기 전에 (0) | 2015.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