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의 캠퍼스는 꽤나 조용했다. 과제기간이라 남아 있는 학생들의 수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큰 소리라든가 웃고 떠드는 소리 등은 쉽게 들려오지 않았다. 국문과 예원이 마주 앉아 각자의 전공서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인문대 건물 5층의 강의실도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와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예원이 손에 쥐가 나도록 쓰던 것을 멈추곤 기지개를 켰다. 눈을 몇번 느릿느릿하게 깜빡이더니 폰을 확인한 뒤 참나, 헛웃음을 지으며 무언가 메시지를 보내곤 스트레칭을 했다.
“왜?”
“뭐 사오라고 했는지 까먹었대요.”
정신 없구나, 국문은 조그맣게 웃고는 예원을 따라 기지개를 켰다.
“아, 황보공 없으니까 완전 집중 잘 되네. 애가 왜 그렇게 산만한지 모르겠어요.”
“신방이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멀리 심부름 보낼걸. 빠바나 떡볶이집 같은 데로..”
“네가 그 얘기 하니까 떡볶이 먹고 싶다.”
“이따 집 가면서 먹고 갈래요?”
“그래."
말해놓고도 조금 쑥쓰러운지 예원이 얼굴을 긁고는 턱을 괴었다. 다시 연필을 드는 국문을 흘끗 본 예원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어.. 이상해?”
국문이 괜시리 폴라 안에 손가락을 넣고 목을 늘였다. 그가 입술을 살짝 핥는 순간 예원이 책을 내려놨다.
“아뇨, 형 거의 셔츠 입은 것만 봐서요. 되게 잘 어울려요.”
“고마워.”
한번 생긋 웃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구는 국문에게 예원은 은근슬쩍 호기심이 생겼다.
“신방형이 사줬죠?”
“어, 어떻게 알았어?”
어라, 이 형 좀 보게. 오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는데. 예원은 불그스름해진 국문의 뺨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신방형이…"
“까까 대령이오!!!”
강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의 공이 뚱뚱한 비닐봉투를 의기양양하게 흔들며 들어왔다. 뭐가 신났는지 신방 역시 킬킬대며 뒤따라 들어왔다. 예원이 호인지 불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과자 만들어서 오냐?”
“미안~ 신방이형 완전 선택장애라서.”
“야, 똑같은 초코우유 앞에 두고 3분 씩이나 고민한게 누군데?”
공이 비닐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봉투가 거의 죽어갈 때 쯤 양 손으로 우유팩 두 개를 꺼냈고 공은 초코우유 두 팩을 예원의 눈 앞에 흔들어보였다.
“이거는 좀 더 단거. 이거는 좀 더 부드러운거. 뭘 더 좋아하는지 아직 못 물어봐서.”
“어?”
예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좀 더 단 초코우유를 집었고 공은 웃으며 왼손에 들려있는 좀 더 부드러운 초코우유를 까 벌컥벌컥 마셨다.
“아주 꼴값을 떨어라…”
신방이 못마땅한 얼굴로 쏘아붙이며 후드 주머니를 뒤적였다. 주머니에선 빼빼로 상자가 나왔고 신방은 국문에게 그걸 건넸다.
“아몬드."
“고마워.”
“형도 나 뭐라 할 처진 아니거든? 빼빼로 다 뽀개지면 안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굳이~ 주머니에 넣어온 사람이, 어?”
“네가 그렇게 봉투로 쥐불놀이 하듯이 휘저으니까 그렇지..”
똑. 그 시끄러운 대화가 빼빼로 부러지는 소리로 일순간에 멈췄고 모두가 국문을 쳐다봤다.
“..왜?”
“형도 군것질을 하네요.”
“가끔?”
황보 이 새끼 시비 털고 앉았네. 신방은 궁시렁 거리며 국문의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빼빼로를 하나 집어갔고 예원이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근데 형도 진짜로 뭐라 할 처진 아닌 것 같아. 그 폴라티 형이 사준거지?”
신방이 빼빼로를 씹다 말고 기침을 했다. 사레가 들렸는지 시뻘개진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신방과 그만큼은 아니지만 빨갛게 된 얼굴로 옆에서 잔뜩 얼은 채 신방을 곁눈질 하는 국문 역시 볼만 했다.
“형 괜찮아?"
“너네.. 나한테 불만있냐…"
“아니 그냥.. 형이 저번에 그랬잖아. 국문형한테..”
예원이 뭐라 더 말을 하려했지만 신방이 예원의 앞에 있던 초코우유로 입을 틀어막았고 그대로 예원은 초코우유를 책상에 흘렸다.
“야..! 너 진짜..”
“참나.. 그게 그렇게 별거야?”
화장실이나 갔다 올게. 예원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을 털고는 공에게 손짓했고 공은 멍한 얼굴로 예원을 따라 나갔다.
“신방..”
“아 몰라..”
신방이 뒤에서 국문을 잔뜩 끌어안았다. 국문이 살짝 고개를 틀자 신방이 국문의 어깨에 더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너한테 이것저것 해주고 싶기도 하고… 내 옷 사러 가서 보면 이것도 너한테 입혀보고 싶고, 저것도 입혀보고 싶고 뭐 그래서. 아니.. 옷걸이가 좋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키도 크고…"
국문이 손을 뻗어 신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방은 더 세게 국문을 안았다.
“송예원이 뭐래.”
“잘 어울린대.”
“당연하지. 이렇게 예쁜데.”
신방이 고개를 빼꼼 들자 국문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끄러우니까 예쁘다고 그만 할래?”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뭐라고 그러냐?”
국문이 삐죽 내민 신방에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신방은 국문의 맞은편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고 둘의 키스가 더 깊어졌다. 신방이 점점 국문을 끌어당기며 책상에 펼쳐져 있던 국문의 책이며 공책을 깔고 앉았다. 국문의 손이 신방의 엉덩이 쪽을 기웃거리자 신방이 국문의 손목을 잡았다.
“야.. 과즈..”
“므… 왜…"
“으응..!”
“뭐… 아!!!"
신방이 입을 움켜쥐며 국문에게서 떨어졌다.
“넌 왜 맨날 깨물어?!”
“과제 깔고 앉지 말라고!”
아. 그제서야 신방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책상엔 공책이 서글프게 구겨져 있었다.
“…"
“신방아.”
“..죄송합니다.”
“김신방.”
“…네.”
“가서 레드불 사와.”
국문이 주머니에서 카드를 건넸고 신방은 아무 말 없이 카드를 받아들어 문으로 향했다. 마침 예원과 공이 강의실로 들어왔고 신방은 축 처진 어깨로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신방아!”
문을 닫으려는 찰나 국문이 신방을 다시 불렀고 신방은 조심스레 국문을 돌아봤다.
“두 캔 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