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리퀘인듯 리퀘 아닌 리퀘 같은 연성
호소미치조 현대물
이 글을 리써님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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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지 경이로운지 모를 폭설이 내린지 이틀 째 되는 밤이었다. 소라는 하필 이렇게나 추운 날에 자신을 불러낸 스승이 귀가 간지러워 벅벅 긁을 정도로 푸념을 늘어 놓으며 길을 걸었다. 집보다 그의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 정도로 그와 함께 하는 때가 많았지만, 오늘은 일년에 몇 차례 밖에 없는 휴가 중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얼마만에 온 휴일인데 뉴스는 6년 만의 한파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나 지껄여댔고 기분이 상한 소라는 집에 틀어박혀 절대로 나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을 한지 54시간 만에, 스승인지 뭔지 하는 아저씨는 기어코 그를 불러내고야 말았다. 목도리에 장갑에 마스크에, 소라는 중무장을 하고 빙판길을 나섰다.
"아, 소라군!"
옷을 두껍게 껴입었을텐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라보이는 그의 스승이 가느다란 손을 흔들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바보 같긴. 역 안에서 기다리라고 문자를 보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바쇼는 몸을 달달 떨면서 역 밖에서 그를 맞이했다. 소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인사를 건넸다.
"6년 만의 한파라는데, 멍청하게 밖에서 기다릴 건 뭡니까. 몸도 부실한 중년 주제에."
"부실하다니! 소라군이 내 짱짱 멋진 이두박근을 못 봐서 그러나 본데-"
"그런 소리 할거면 추워서 덜덜 떨지나 마시죠."
"웬일로 걱정해주네."
소라군이 걱정해 주는건 오랜만이야, 바쇼는 배시시 웃었다. 오랜만이라니, 그 전에도 당신을 걱정한 적은 없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소라는 참았다. 차가운 것은 지금 내리는 눈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과거의 일을 복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걸 자신도 알고 있다는 듯 바쇼는 조그맣게 웃어보였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요?"
"아, 이거 전해 주려고."
바쇼가 후줄근한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소라는 꽤나 묵직한 봉투를 받아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책의 가제본인 듯 했다.
"이게 뭡니까?"
"왜, 저번에 동료 작가가 신작을 하나 낸다고 했지? 그 책 가제본이야."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소라군, 그 친구 좋아하잖아."
하라는 교정은 안 보고 인터넷으로 그 작가 블로그 읽고 있는 거 다 뽀록 났지롱- 입을 쭉 내밀고 그를 놀리는 바쇼를 무시하고 소라는 봉투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기분이 나빴다. 딴짓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킨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바쇼가 알고 있다는 것보다, 자신을 위해 바쇼가 노력을 했다는 것보다, 그가 '아직도' 자신을 신경써준다는 사실에 소라의 안에선 울컥하고 열 아닌 열이 치밀었다.
"어째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이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뭐어? 그 친구한테 다 이를거야~"
바쇼는 어린애처럼 말도 안되는 땡깡을 부렸다. 아직도 철이 덜 들었군, 소라는 서류봉투로 바쇼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아!! 소라군 너무하는 거 아냐?"
"이거 하나 주려고 불러낸 겁니까? 이 추운 날에?"
"그치만~ 소라군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주고 싶기도 했고.. 휴가 기간에 읽으면 맘 편하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잖아?"
"언제까지 절 신경 쓰실 겁니까?"
싱글벙글 웃던 바쇼의 얼굴이 일순간 짓밟혀 녹아버린 눈처럼 허물어졌다. 그러나 곧 바쇼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는게 당연하지. 내가 총애하는 제잔데."
거짓말. 차마 내치지 못하는 옛 정인이겠지. 소라는 입술을 깨물며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들어가겠습니다. 밥 먹자거나 커피 마시자거나 떼 써도 소용 없어요."
"알아."
그렇게 말하는 바쇼의 얼굴은 체온 때문에 녹은 눈 때문인지 조금 습해보였다. 더 이상 흔들리면 곤란하다. 그동안 잘 견뎌왔다. 행복했던 날들이 꺼내고 싶지 않은 그 옛날의 무언가로 변색해버린 후에도 그들은 화풀이와 속앓이를 지면에 해가며 각자의 업에 충실해왔다. 점점 작아져 가는 것만 같은 은사의 어깨를 감싸고 억지로라도 안고 싶은 적도 부지기수였지만 그럴 때마다 스승의 시집을 한 페이지 씩 찢어내는 것으로 그 파괴욕을 상쇄했다.
"휴가 잘 보내고 다음 주에 봐, 소라군."
어느새 서너 걸음 쯤 물러서있는 바쇼가 소라에게 인사를 했다. 소라는 가볍게 목례를 하곤 바로 뒤를 돌아 스승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힘이 실린 걸음이 왜인지 점차 느려졌고 소라는 결국 그 자리에 멈춰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다시 꺼냈다. 가제본을 펼쳐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는데 자그마한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소라는 눈에 젖어가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둘이서 보았던 눈, 올해도 그렇게 내리었을까.
소라는 홱 몸을 돌렸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종종걸음으로 돌아가는 바쇼의 뒷모습이 흐릿했다. 때를 잘못 탄 것이겠지, 당신도 나도, 6년 만의 한파보다 더 놀라운 인과로 우리가 만나고 헤어졌음에도 여전히 함께라는 사실도. 눈발이 언젠가 걷히고 기온이 올라가는 계절이 오면 당신과 나의 마음에도 무언가가 피어나긴 할까. 소라가 봉투를 끌어안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날은 밤새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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