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드레, 또 비가 내린다. 비가 창문이고 나무고 도로고 가리지 않고 흠뻑 적실 동안 너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그게, 지금 창 밖으로 보이는 온 세상보다 훨씬 젖어있던 네 두 눈이 자꾸 마음 한 켠에 데굴데굴 굴러다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렇게까지 시간을 흘려버릴 줄 알았으면 미안하다고 빨리 말할 걸. 나는 매일 밤을, 아니 아주 조금 과장을 보태 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 종일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너 때문에, 아니 나 때문에.

  흔한 연인들의 다툼처럼 사소한 일이 원인이었다. 누구 하나가 살짝만 굽혀서 미안해, 그 발음도 쉬운 세 글자를 말했다면 끝났을 일이었다. 아, 나는 왜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가지고. 조금 인상을 쓰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길 느릿느릿 꺼내자 네 숨결이 조금씩 떨려왔더랬다. 그 때 멈췄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너를 안쓰럽다 생각하면서도 기어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고 결국 네 눈에서 투명한 뭔가가 흐르는 걸 보고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중인지를 알게 됐다. 미안. 그제서야 소리로써 나온 그 말은 내가 아닌 네 입에서 튀어나왔고 나는 그대로 가버리는 네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질 때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돌아갔다. 그 날은 그렇게 보냈다. 그 다음 날과 그 다음 날은 조금 화가 났다. 화난 티도 내지 않는 네가 답답했다. 그 다음 날부터 꽁한 마음이 조금씩 풀리더니 5일 째 되는 날엔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울먹일 정도로 너에게 미안했다. 6일 째엔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젠 네가 예전에 보내줬던 네 시간표를 찾아내 너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여드레, 오늘도 그 때처럼 비가 내렸고 나는 우산 두 개를 챙겨 하나는 쓰고 하나는 가방에 넣고 네 수업이 끝나기를 수업 종료 30분 전부터 기다렸다. 괜히 문에 귀를 갖다대보기도 하고 인상을 팍팍 쓰며 문 틈새를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싸늘하게 젖은 네 눈만 생각나서 나는 한숨을 폭폭 쉬곤 벽에 기댔다. 잠을 통 못 자서 그런지 서서 졸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하여간 널 기다리다 별 쇼를 다 한 것 같다. 그 중에 가장 어처구니 없는 건, 그렇게 혼자 흔들, 흔들거리다 강의실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에 섞인 널 놓쳤다는 거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눈으로 네 뒷통수를 찾아헤맸다. 겨우 발견한 익숙한 뒷모습은 시끄러운 주위를 한껏 무시하려 애쓰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나는 허겁지겁 네 뒤를 따라갔다.
  스토커도 아니고 말야, 나는 네 당당한 연인인데 그렇게 부르고 부르던 네 이름도 못 부르고 네가 걸어간 그 자욱 그대로를 밟았다. 너는 걷는 것도 예쁘네. 살짝 발끝을 모으며 안짱걸음을 걷는 네 다 닳은 운동화 뒤축을 보니 돌아오는 생일엔 커플 운동화를 선물해 볼까 싶었다. 튀는 건 싫어하니까,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게 좋겠지. 아차, 나는 조금 느려진 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너와의 거리를 적당히 좁혔다. 항상 함께 걸을 때면 손을 잡고 걷더라도 네 쪽이 한 발자국 반 정도 뒤쪽에서 걸었었다. 그때 내 옆-뒷모습을 보던 네 기분은 어땠으려나. 너는 내 걸음걸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을까.
  그때 네가 뒤를 돌았다. 나는 깜짝 놀라, 왜 그랬을까, 입을 가리곤 벽 뒤에 숨었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올랐다. 들고 있던 우산은 이미 엉망으로 방향이 뒤틀려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고대로 맞았다. 뭐야, 왜,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사람이 살다가 싸울 수도 있고 화낼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는 건데, 나는 그게 너라고 하면 당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 눈을 질끈 감고 발을 동동 굴렀다.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네가 울지 않았으면, 네가 행복했으면. 나로 인해. 그렇게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 채 저어기서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있는 네 얼굴이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른다. 저기 있잖아, 잡을 수 있잖아. 나는 기울어진 우산을 바로 쓰고 다시 길가로 나왔다. 조금씩 잦아드는 빗속에서 나와의 거리를 벌려가는 네 뒷모습이 나를 부르는 것 같다. 가자, 지난 여덟날 동안 네가 나랑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당장 잡아야겠다.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일단 네 맑은 두 눈을 보면서 미안하다고 또박또박 말해야지. 그리곤 네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말할 거야. 정말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에서 뭔가가 자꾸자꾸 밀고 올라와 내 눈으로 흘러넘칠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내가,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안 될 거야. 나는 점차 개어가며 모습을 드러내는 하늘이 비쳐 구름빛을 띠는 길바닥을 찰박찰박 뛰었다.

  “신지 군!!!”

  내 목소리에 네가 뒤를 돈다. 조금 놀란 것 같더니, 뭐야, 웃잖아. 역시 너도 그랬나보네. 우산 그냥 하나만 챙겨도 됐을 걸. 나는 네 손을 덥썩 잡았다. 빗기운에 차가운 네 손을 그 자리에서 녹일 기세로 꼭 쥐었다.

  "신지 군, 정말..."
  "고마워, 카오루 군."

  네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너는 몰랐겠지만 조금 운 것 같다. 비는 여드레 동안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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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머더래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