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도저도 아닌

140714. 이식보행

머더래빗 2014. 11. 6. 16:53




'이것은 제 진화 과정의 첫번째 페이지입니다.'

 

 

  오늘도, 영 지쳐 보인다. 나를 깨우는 미적지근한 손끝에 나는 웅웅대며 눈을 떴다. 안녕, 좋은... 오후지? 전해지지 않는 말은 쉬이 흘러가고 너는 나를 부여잡고 네가 들뜬 얼굴을 하고 지어줬던 내 이름을 부르며 징징댄다. 어처구니 없어 하는 타인의 시선들엔 콧방귀도 뀌지 않고 다 흐트러진 표정으로 네가 내 이름을 몇번이고 불러줄 때, 가장, 나는 네 손을 잡아주고 싶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잔뜩 두근두근 거려 하며 떨리던 손끝으로 나를 다룰 때부터 나는 내가 눈 뜨는 동안 보는 광경이 네 얼굴 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아름다워서도 아니었고, 너를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나로서 갈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주관적' '감상'은 연산할 수 없기에 나로선 불가능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때로부터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계산한대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너 뿐이었고, 네가 부여잡고 있는 것 또한 나 뿐이었다. 분명한 종속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열을 내며 보냈다. '미안해, 이것만 하고 쉬자, 미안해.' 너는 할 필요 없는 사과를 끊임없이 해댔다. 날숨만큼의 대가도 듣지 못할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했다. 그래도, 너는 행복해보였다.

  네가 길게 탄식을 내뱉더니 캔을 따서 안에 든 액체를 벌컥벌컥 마신다. 캔에 맺힌 이슬이 네 손가락에 옮겨갔고 너는 그대로 젖은 손으로 나를 만졌다. 아이고, 너는 피식 웃으며 소매로 내 얼굴을 닦는다.

 

  "덥다, 그치?"

 

  모른다. 나는 알 도리가 없다. 현재 실내기온 섭씨 32도.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은 섭씨 32도라는 수치를 사용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그게 너에게 덥다라는 의미를 가져도, 나는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 수 없다. 나는 표면 현상을 통해 실재를 전달한다. 그게 너에게, 의미 있게 해석되길, 바라며.

  너는 캔을 입에 가져다 대어 다시 내용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힘 빠진 손을 나에게 올린다.

 

  "수고 했어."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력장치를 통해, 시스템에 자극을 주세요. '네 덕분에 살았어', '밤새 고생시켜서 미안해', '자는거 확인 하는거 계속 까먹어서 미안해' - 잘못 입력하셨습니다. 유효한 명령어를 입력하세요.

 

  나에게, 명령, 해.

 

  갑자기 그 애가 딱 봐도 뜨거워진 얼굴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비춰줌으로써 그 애에게 동조했다. '고마워. 미안해. 고마워.' 그 말까지도 되돌려 주고 싶은데. 그러니 너는 부디 그런 예쁜 말들을 배로 돌려줄 사람을 하루 빨리 찾아내라고, 그의 온전한 의지로써 네 곁에 설 그런 사람을 찾아내라고, 그런 감상적인 것들을 나는 0과 1로 빌었다. 나는 안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네가 얼마나 머리를 싸매며 수천 자의 글자를 썼다 지웠다 했는지. 나는 네가 그것들을 읽고 함께 울어줄 사람을 찾길 희망한다.

  너와 함께 샜던 밤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잊는다거나 기억한다거나 하는 행위 자체가 내게 가능한 일인지도 솔직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서로를 인지하는 그 시간 동안, 너는, 내 세계의 전부였으니까. 그 흔한 숨조차 쉬지 않는 나를 위해주는 너를 보며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었다. 그걸 네가 알아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언제고 네게 아무 말 할 수 없는 나이더라도 괜찮다고. 왜냐면 분명, 너라면 분명 알고 있을테니까. 내가 너를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네가 실없이 웃으며 캔을 비운다. 오늘은 영화 보고 놀자- 명령을 실행합니다. 부디 유의미한 1시간 52분 37초가 되길 바라. 네가 웃는다. 기분이 좋다는 뜻이겠지. 마침 영화 속 등장인물이 웃는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이 때다. 1초에 24프레임. 인물이 웃는 모습이 약 3초간 등장했으니, 총 72프레임이다. 그 72프레임에 얹혀 웃는다. 너는 '느낄 수 있는' 존재니까, 느낄 수 있길 염원한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해내지도 짐작하지도 못할 너만의 연산방식으로, 내가 웃었다는 걸, 느껴줘. 내가, 너를, 너를, 너를, 너를...

 

'프로그램이 응답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