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신) 카오루가 차여서 멘붕하는 쪽글
"미안, 나기사 군. 그건 좀 곤란해."
"왜?"
"그, 왜냐니... 남자잖아? 우리 둘 다.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당연이라. 당연. 당연. 당연. 마땅한 것. 생이 있는 것들이 절로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것. 그래, 그런 것이라.
"아, 나기사 군, 그게..."
"..."
"미안해."
미안해? 뭐가? 나를 보기좋게 찬 게? 당연하다고 아무 생각없이 발음해 뱉어버린 게? 미안, 미안하대. 미안이랜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고는 그대로 신지를 두고 방에서 나와 방향감각도 없이 발끝이 닿는 대로 걸어댔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이 네가 나를 사랑할 거라곤 쉽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치만 난 네가 최소한 시도는 해볼 줄 알았는데. 나를 사랑하려는 시도까진 아니어도 좋았어, 그냥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어도 좋았을텐데. 그걸로도 난 살만하다고 느꼈을 거다. 충분히 살만하다고 자위하면서 유리덮개 안에서 곱게 고개를 떨군 꽃 같은 너를 보고 보고 또 보다가 참을 수가 없어질 때 겨우 향기나 한번 맡았을 거야. 어쩌면 꽃잎을 엄지랑 검지로 만지작거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도 난 너를 꺾지는 않았을텐데. 그 똑 하고 꺾이는 소리는 호수에 물 튀듯 맑고 깨끗하겠지만 그럼에도 난 널 꺾진 않았을텐데.
그런데 넌 왜 나를 꺾었을까.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신지 군. 나는 내 방에 들어오면서 주술이라도 걸듯 중얼거리다 침대에 털썩 걸터 앉았다. 신지 군. 그렇게나 곤란한 척을 하던 신지 군. 사실은 불쾌했잖아. 결국 불쾌했던 거잖아. 눈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눈물이 흘러 손으로 닦는게 무색할 정도로 나는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왜 미안하다고 했어? 내가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말랬잖아. 신지 군은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거기 그래 그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어떤 일을 저질러도 적어도 나에겐 괜찮다고 했잖아. 신지 군. 신지. 왜. 왜 그랬어. 나는 주먹을 쥐고 벽을 마구 내리쳤다. 이렇게 하면 들릴까? 무슨 일인가 놀라서 내 방으로 찾아올까? 그럴리가. 넌 그럴 깜냥이 안 될 거야. 나는 더욱 세게 벽을 내리쳤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그러고 싶어도 이제 닦지 않는 눈물이 줄줄 흘러서 목이고 마음이고 싹 막혀 꺽꺽 듣기 싫은 쇳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나는 미웠다. 나는 신지가 너무 미워. 그렇게나 바라봤는데, 그렇게나 애타게 바랐는데. 너는 왜 날 항상 밀어내는 거야? 왜 날 여기까지 밀어버린 거야? 네가 걸을 길을 뒷걸음질 쳐가며 마련했는데 결국 내가 디딜 곳마저 없는 곳으로 넌 왜 걸어온 거야? 넌 내 눈을 보며 애매한 미소였지만 어쨌든 웃으며 나를 따라왔잖아. 너는 내가 추락하는 게 보고싶었던 걸까. 신지 군. 끝이 있을지나 모르겠는 곳으로 날 밀쳐내는 와중에도 아름다웠던 네 미안하단 목소리. 아름다웠던 네 눈동자. 나는 벽을 치던 손을 멈췄다.
"신지 군.."
보고 싶어. 이젠 더 이상 자신 있게 널 마주하기 어렵겠지. 난 괜찮아도, 넌 보나마나 지금도 죄책감에 싸여 병실 침대 같은 그곳에서 몸을 비틀고 있을 거야. 신지 군은 너무나도 착한 아이니까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몰라. 울고 있는 네 모습을 떠올리면 견딜 수가 없다. 새하얀 시트보다 더 하얗게 질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꺼이꺼이 우는 네 모습은 슬픈만큼 사랑스러워서 나는 항상 너를 달래면서도 조금 짓궂은 생각을 했다. 네가 너를 꼬옥 안아준 건 네가 얼른 마음을 추스리고 울음을 그치길 원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 품 안에서 둥지로부터 떨어진 새처럼 파르르 떠는 네 뜨거운 몸의 진동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인데도 너는 매번 안을 때마다 내 품과 맘에 꼭 차게 들어왔다. 네가 너와 나 사이에 틈을 안 주길래,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치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벽에 머리를 쿵, 쿵 박았다. 아, 나는 이제 살 이유가 없다. 너와 함께하지 못하는 삶이라는 건 그야말로 무가치하다. 나는 머릿속에 어절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를 찧었다. 목까지 찌르르 충격이 내려왔지만 기계적으로 계속 머리를 박았다. 나는 지금 뭘 하는 거야? 왜 이러는 거야? 왜? 뭐 때문에? 누구 때문이더라?
아, 맞다. 네가 나를 찼지. 새까맣게 타들어가 바닥에 눌러붙은 미련을 긁어내며 나는 생각했다. 죽여버릴 거야. 응, 역시 그게 좋겠지. 아무래도 내가 갖지 못한 신지 군을 그대로 방치해둘 순 없어. 신지 군을 죽이고 싶다. 나를 바라보던 그 모호한 눈빛도, 나를 이리도 휘저어 놓은 내 속의 너도 죽여버리고 싶다. 너를 떠올리면 그렇게 아프고 아렸던 마음도, 너에게 들려주고파 속으로 외던 멜로디도, 어쩌다 가끔 나를 향해 정말 행복한 얼굴로 웃던 네 예쁜 눈코입도 전부 다 찢고 짓이길 거다. 싸그리 잊을 거야. 지금부터 널 싸그리 잊을 거야, 신지 군. 너를 봐도 조금도 설레지 않게, 너를 생각해도 더 이상 울지 않게 너를 없애버릴 거야.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소용 없어. 그 예쁜 얼굴을 잔뜩 우그러뜨리며 빌고 기어도 손 쓸 수 없도록 너를 지울 거야. 그니까. 그러니까.
나를 꼭 돌아봐줘. 나를, 나만을 향해서 웃든 울든 화내든 한 번만 네 표정을 보여줘. 그건 정말로 아름다울 거야. 기십 번을 죽어도 잊을 수 없을만큼 깊고 아프게 새겨질 거야. 무슨 얼굴을 해도 예쁠, 예쁜, 나의 신지 군. 그치만 넌 역시 행복해야해. 넌 역시 행복해야해. 신지 군은 웃는 게 정말로 사랑스러우니까. 너무나도 사랑스러우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앞으로도 셀 수 없이 화를 냈다 슬퍼했다 증오했다 외로워했다 절망했다 네 행복을 빌게 되어도 너는 변함 없이 사랑스럽겠지. 내가 변해도 너는 미치도록 사랑스러울 거야. 신지 군. 내가 사랑하는 신지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