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카오신) 성년의 날
머더래빗
2015. 5. 18. 23:19
해가 지고 나서도 여전히 왁자지껄한 캠퍼스가 낯설다. 성년의 날. 그 전까지만 해도 이게 중요한 날인지 어떤지 전혀 감이 안 왔을 정도로 생경한 날이었지만 묘하게 들뜬 분위기에 모두가 흔쾌히 마음을 맡기곤 이런저런 것들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즐겼다. 내 가방에도 과 학생회에서 나눠준 장미 한 송이와 이런저런 군것질거리가 들어있었지만 나는 그닥 기쁘거나 하진 않았다.
“신지 군!”
그게, 영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로써 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데이의 중간 쯤 되는 것 같은 무게감이 나에겐 와닿지 않았다. 일률적인 것에 순응하는 건 쉬웠지만 그게 나를 바꾼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성년, 어른, 하는 것들은 조금 애매해서 나는 받아든 꽃마저도 별로 예뻐 보이지 않았다.
“신지 군.”
나는 내 팔이 붙들리고 나서야 인기척을 느끼고 이어폰을 뺐다. 나를 붙잡은 그 하얀 손은 어정쩡하게 이어폰을 들고 있는 내 손을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감싸쥐었다.
“아, 미안해, 카오루 군. 잘 못 들었어..”
“괜찮아.”
“근데, 이건...?”
날이 날이라, 카오루는 빙그레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 걸음을 맞췄다.
“학교에서도 줬지?”
나는 끄덕였고 그는 나를 더 자세하게 보려는 듯 조금 더 고개를 틀었다가, 입을 한번 삐죽하고, 다시 정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동기들하고 약속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연락 안 했는데, 아까 우연히 아스카랑 만나서 물어봤더니 아니라고 하길래.”
“그냥.. 좀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술 먹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니까.”
“맞다, 신지 군은 술자리 별로 안 좋아했지.”
평소 작별 인사를 나누던 횡단보도에 멈춰섰지만 카오루는 방향을 틀지 않고 그대로 내 옆에 섰다. 학교 근처에 있는 내 자취방까지 그와 같이 가는 일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이걸 ‘바래다준다’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나는 쉽게 얼굴이 뜨거워지곤 했다. 더군다나 오늘 같이, 꽃이라도 선물 받은 날은. 나는 미처 말하지 못한 비밀이라도 있는 꼬마애처럼 발끝을 비비적거렸다. 곧 초록불이 켜졌고 우리는 횡단보도를 서서히 건넜다.
“조금 우스운 얘기긴 한데.”
“응?"
“성년이 된 기분, 어때?”
나는 깜빡깜빡 점멸하는 초록불의 잔상을 느끼며 묵묵히 걸었다. 그도 함께 묵묵히 걸어줬다. 우습다기보단, 역시 조금 애매한 이야기다.
“실은.. 잘 모르겠어. 성년이라든가 어른이라든가. 성년의 날이 됐다고 뭐가 달라진 걸지.. 그냥 말 뿐인 거잖아, 사실은."
“그런가.”
평소답지 않게도 카오루는 나의 푸념에 얼추 수긍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너라도 아닌 건 아닌 거겠지. 나는 장미를 감싼 비닐을 괜시리 부스럭부스럭 만졌다.
“카오루 군은 어땠어? 작년 성년의 날 때.. 축하도 많이 받고 그랬을 거 아냐.”
“나도 크게 다를 건 없었어. 올해처럼 작년에도, 아니 작년처럼 올해도 학생회 애들이 이런저런 선물을 나눠줬고, ‘안녕’, ‘밥 먹었어?’, 같은 인사 대신에 축하한다는 얘길 했고. 그 땐 그냥 때가 돼서 어른이라 한다고 생각했지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변한게 있었다고 생각해. 그게, 짧다고 한다면 짧을 수도 있지만, 꽤나 여러 날을 살고 맞은 성년이잖아. 그 지난 날들이 당장 성년의 날에는 아니더라도 나를 여기까지 오게끔 한 것 같달까. 이렇게 변하게끔 했달까.”
카오루는 조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는 어느새 도착한 자취방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처음엔 그게 싫었어. 변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나도 모르는 의미로 내가 변하는 게 불쾌했어. 그치만..”
나는 숨을 조금 삼켰다. 카오루가 자신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건 묘한 느낌이었다.
“변한다는 건 불가피한 일이기 전에 해볼만한 일 같아. 그게.. 결국은 나의 지난 날들을 모아 또 다른 나를 탄생시키는 거니까. 신지 군도 마찬가지일 거야.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날들을 생각한다면 신지 군에게도 오늘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카오루는 내 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시선을, 돌릴까. 나는 처음으로 그의 눈을 바로 봤다.
“이렇게 변한 신지 군이 아름다워.”
카오루는 내 귓바퀴를 엄지로 조심스레 쓸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흠뻑 들이마셨다.
“카, 카오루 군..”
“향긋해. 장미나 향수 같은 건 다 일시적인 냄새일 뿐이야. 그치만 신지 군의 냄새는 신지 군 자신에게서 나오는, 지난 열아홉 해 동안 성장해온 내음이야.”
성장, 한 건가. 그 붉은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만약 내가 정말로, 정말로 성장했다면, 앞으로도 성장한다면, 그건 아마 네가 곁에 있기 때문일 거다. 네가 그 눈으로 나를 봐주기 때문에, 네 두 눈에 내가 있기 때문에.
“신지 군을 사랑해.”
나는 카오루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라가는 입술을 앙 물었다. 카오루는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오늘, 안 받았지?”
“응?”
나는 내 허리를 감싸쥔 카오루의 손에 이끌려 그의 품에 안겨들어갔고 그는 나에게 그대로 입을 맞췄다. 오늘 내내 캠퍼스를 수놓던 붉은 빛 향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내 입 안에 가득 퍼졌고 나는 그의 옷소매를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벌써 밤이 더워지는 때가 왔나 봐, 나의 성년의 밤은 조금 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