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더래빗 2015. 3. 10. 03:52

  교복을 입고 맞는 마지막 날엔 꼭 사람들이 전부 다 빠져나간 학교를 보고 싶었다. 부러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았던 나는 끝내 야트막한 건물들 너머로 해가 떨어지는 것까지 빈 교실에서 구경했다. 진한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교실문으로 향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시커먼 놈들이 웃고 떠들고 싸우고 욕하던 좁아터진 교실이 이렇게나 휑하게 느껴질 줄은, 직접 느끼기 전엔 몰랐었다. 특히 네 자리는 도려낸듯 허전했다.

  멍청해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넌 꽤나 똑똑한 놈이었다. 얌체같은 애들이 매일같이 숙제를 베껴가도 넌 웃으며 노트를 빌려줬고 가끔 철없는 놈들이 시기어린 모진 말을 내뱉어도 조금 머쓱해 할뿐 그러려니 하던, 말 그대로 등신 같은 놈이었다. 마음을 넓게 써서 그랬는지 넌 아픈 곳 하나 없이 무탈하게 그 힘든 1년을 이겨냈고 결국 원하던 곳에 덜컥 붙어 학교의 자랑이 되었다. 수능 이후로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입에 발린 칭찬을 줄곧 들었지만 난 그게 그닥 기쁘진 않았다. 너와 비교가 되어서도 아니었고 네가 아무 입에나 오르내리는게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낄 데가 없는 것 같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좋아한다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괜히 네가 앉았던 자리를 똑바로 정리하고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다 걸어내려와 건물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익숙한 실루엣이 튀어나왔다. 참나,

  "어처구니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찾았는데! ㅇㅇ한테도 전화하고 ㅇㅇ한테도 톡했는데 다 모른대잖아!"

  "여깄는 줄은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래서 왜?"

  "그냥 네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아냐, 아니다.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아, 바보 같은 새끼. 등신 새끼. 너는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것 같은 얼굴로 다 풀어헤쳐진 웃음을 지었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웃음이다. 머저리 같은 놈. 나는 양팔을 가능한 크게 벌렸고 너는 나를 꽉 차게 안았다.

  "졸업 축하해."

  "너도. 축하한다."

  "꼭 연락할게."

  "카톡 씹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나를 한가득 끌어안은 네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답답했다. 알 수 없는 뭔가가 내 호흡을 밀어내며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게 꼭 앞뒤 가리지 않는 너와 같아서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어? 너 울어? 왜 울어?"

  "미친놈아 안 울어!"

  "야, 눈물 범벅인데 아주?"

  "너 뒤질래?"

  "너 그렇게 험하게 말하면 여자애들이 싫어한다?"

  "상관 없어."

  너는 나를 안은 팔을 풀고는 또 멍청한 얼굴을 했다.

  "나한테도 험하게 말할 거야?"

  "..왜 이래 징그럽게."

  "ㅇㅇ아."

  너는 다시금 나를 폭 끌어안았다.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드디어 내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만한 틈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앞으론?"

  "앞으로도."

  이대로 있어주라. 너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럴 거지?"

  "기브 앤 테이크."

  "당연하지."

  "그럼 생각해 볼게."

  "ㅇㅇ아."

  "왜 자꾸 불러싸대?"

  "졸업 축하해."

  "아까 했잖아."

  "좋아해."

  나는 네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모두가 다 빠져나간 학교가 보고 싶었다. 마지막엔 전부 비우고 싶었다. 거기엔 당연히 너도 있을 줄 알았다. 사는게 사람 맘대로 안 되네. 그래, 실은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나도 그래.